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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기

쿠바음악과 남한산성



Chan Chan "BuenaVistaSocialClub" LoopstationCover

어둠이 걷히니 눈이 따갑다. 억지로 끄집어낸 몸을 차에 싣고 액셀을 밟았다. 운전에 점점 정이든다. 네비가 없어도 암기된 길을 따라 핸들이 가볍게 돌아간다. 남한산성을 비켜 국도 45번을 따라 용인으로 가는길. 백밀러 뒷편에 중부면 산성리 간판이 또렷하게 보인다. 한때 가슴을 후벼파던 가요가 따가운 햇살을 흐트러뜨린다. 아, 찌질하다. 구질구질한 노래가사로 인해 짜증유발. 주파수를 바꾸니 라디오에서 쿠바재즈가 울린다.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캬아.살것 같다. 콩가, 퍼커션의 경쾌한 리듬이 속삭인다. ' 흑인의 '한'도 별것 아냐'. 나의 짧고 깊었던 시름을 가뿐히 비웃는다.  해금의 절절함으로 비교할 수 없는 초연한 음악, 역시 난 전생에 남미에서 어선을 탔던 어부의 딸임이 분명하다.모든 절절함이 귀찮아질 정도로 나의 기분은 부유한다. 고작 쿠바재즈로 인해 말이지.

고민은 깊고 짧았다.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어느 할아버지 멤버는 "인생의 꽃은 여자와의 연애다"라고 말했다.
그는 죽고 없지만 그의 경쾌한 인생관은 콩가에 튀겨 내가슴에 생생하게 박혔다. 남미음악은 내 삶의 리듬과 닮았다. 분노, 한, 슬픔, 애환은 더이상 구질구질하게 내장을 훑지 않는다. 꼭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건 아니다. 춤을 추기 위해 들썩이기도 한다. 운전석에서 한참 들썩였다. 난 살아있고 인생의 꽃은 유효하다.

작필본능, 갑자기 수첩을 꺼내들고 싶었지만 나는 달리는 중이었다. 이 느낌을 고스란히 적어보고 싶었지만 녹음기가 없다. 병원에서 끄적여보지만 차에서 내리는 순간 언어들은 콩가에 튀겨 날라가 버렸다.
엉덩이가 들썩였다. 남한산성으로 달려가고 싶기 때문.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으니 청병의 모가지가 박혔을 법한 남산자락이 뒷목을 당긴다. 나루가 힘겹게 올라온 길, 서날쇠가 배수로로 기어들어간곳, 최명길과 이상헌이 날선 정치를 부렸던 곳, 병사들이 말고기 국물에 밥말아 먹으며 조정을 씹어대던 산자락, 책이 아니라면 남한산성이 이처럼 나를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등산객의 소음과, 산을 가로질러 송파로 가려는 차량들 틈에 한참을 서있다가 내려왔다.

아라비카, 커피하우스. 삐걱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산장의 따뜻한 기운과 학림다방이나, 바오밥나무에서나 맡을 수 있을 법한 커피향이 훅 느껴진다. 회색머리털을 한 사람이 흡연에 대해 안내한다. 남한산성을 여러번 방문했음에도 아라비카를 발견해내지 못하다니, 오래도록 머물고 싶어 커피를 주문하려니 주머니에 현금이 달랑 6천원.
브랜드커피는 6500원이었다. 최대한 쪽팔리지 않게 의연한 걸음으로 삐걱이는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혼자 놀다보면 이런날도 있다. 피식!

아라비카의 커피향을 머리로 기억하고 커피믹스를 마신다. 집에오니 아무도 없다. 느므 좋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놀기란 더욱 산뜻하다. 어디보자, 쿠바재즈가 있던가. 음악좀 뒤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