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온다. 명동칼국수집에 들어선 선배와 나. 눈인사를 주고받고 한참 말을 잇지 않았음에도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가 이런 관계였던가? 눈가의 주름을 인식하지 못하듯, 우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변했다. 늙수그레해진걸까? 아님 이제서야 관계가 보이는 걸까?
난 단호하게 해산을 권유했다. 선배는 의외여서 놀랐다고 말했다. 차마 아무도 꺼낼 수 없는 말을, 가장 놓고 싶어하지 않을만한 사람이 입밖으로 꺼내니 놀랄 수 밖에. 정리도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정리를 논할 수 있는 조직이 그나마 건강하다고... 고작 동호회 같은 모임일 뿐인데 유지를 위해 존재시키고,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당위적으로 책임을 지는 건 너무 잔인하다. 아니 멍청한 짓이다.
그동안 재밌게, 열심히 흥망성쇠안에서 실천하고 성찰했고 나름의 성장을 가슴속에 갖고 떠나면 되는 것이지, 책임 운운하며 멋도 모르는 타인이 욕한다 한들,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몸한번 불살라보지 못했던 타자가 회자정리를 가지고 책임 운운한다면 그건 염두할 가치도 없다. 연애인도 아니고 그 다수에게 신뢰는 받아 뭐하며, 인기는 많아 어디다 써먹을거냔 말이지.
난 선배도 의외였다. 10년 전, 지금처럼 점심을 먹으며 함께하자고 권유했었던 나, 낭창낭창하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설득했었다. 그는 나의 설득으로 움직인 게 아니고 움직이고 싶어 움직였고, 우리는 함께 해왔다. 이데올로기고 나발이고 일하는 스타일 자체, 기질 자체가 너무 달랐던 우리는 사사건건 맞지 않았으나 선배가 많이 참아줬다. 지금생각하니 그렇다. 너무나 시혜적인 사고방식도 맘에 안들었고 사업가 마인드로 하다못해 명절선물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책임감이 낯설었다. 우린 동지 아이가? 하면서 진심으로 고맙게 받아들인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린 별로 친하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로 10년.
그러나 우린 어려운 고민에 봉착했다.
그리고 끝까지 고민하고 마무리 해야할 심정적 책임도, 우리 둘, 오롯이 남았다.
점심먹는 이 짧은 시간에, 우리 조직에 얼마나 애정이 있었는지 그에게 확인할 수 있었고
나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수 있었다.
더 오래 만나고 더오래 관계했으나 타인의 말 한마디에 나를 재단해 버렸던 사람도 있건만
그 빗발치는 모함과 비난 속에서도 그리 친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실천적인 경험으로 나를 바라본 사람이었단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쉬워했다. 너무 아깝다고.
하지만, 잘 된 조직은 그 자체로 돌아갈 수 있으니 동호회로 이어갈 수 있다고 했고, 다른 조직에 넘길 수 있는건 넘기자고 했다. 내가 하든 남이 하든 결과적으로 지역에 조금의 도움만 되면 되는거 아닌가.
정치적 욕심도 없었고, 행사 때 나가서 인사한마디 하는 것도 꺼려했던 사람이, 자신에겐 돈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 책임져야할 일에는 아낌없이 썼던 사람이, 비난이 없고 합리적 토론을 즐기던 사람이, 결국 남았다.
가져갈 게 없는 조직에 남는 건, 가져갈 게 없는 관계에 남는 건 청소하는 자 뿐이다.
관계는 이렇듯,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갈등 상황일때, 속살이 보이기 마련이다.
만난 횟수를 들이대는 건, 그만큼 관계의 질이 깊이 않다는 뜻일게다.
애써 내가 누구누구랑 친하다고 떠들어 대는 건 친하지 않음이 불안해서일 게다.
난, 오늘, 선배를 만나면서 이제서야 우리가 관계라는 게 시작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 웃긴건 블로그에는 '선배'라고 썼지만(달리 호칭할 게 없어서) 평소에 그를 한번도 선배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선생님? 혹은 000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