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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기

최규석, 그사람 참.

곰팡이도 꽃처럼 핀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냄새나서 얼른 털어버리고 빡빡 씻어내야 할 것 같은 가난을 교과서적으로 설명하자면
'자랑은 아니지만 부끄러울 것도 없다'로 일갈할 수 있지만 그게 그리 쉬운가 말이다.
가난을 처절하게 겪어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 말이 서걱거릴 수 있다.

얼마전 아카데미 수료식날, 동료들은 롤링페이퍼를 돌렸다.
나를 두고 한결같이 '할말은 하는' ' 쿨한' '시원한' '스타일이 멋진' 등등 다소 좀 도회적인 평이 이어졌다.
보여주고 싶은 나를 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바라봐 준 친구들을 보면서 쓴 웃음이 나왔다.
그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리 '도회적'인 이미지에 매달렸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20대를 보낸 듯 하다.
유년의 대부분을 시골서 보낸 나로서는 대학졸업 후 서울 생활이 낯설었다.
어렸을 때 이야기를 꺼내면 '625때 태어났냐며' 사람들은 나를 구라쟁이를 보듯 했다.
아파서도 아니요, 좋아서도 아니요. 그저 경험이 그래서였는데 그건 동정심을 유발하는 남자꼬시기에나 들이댈 법한 이야기였음을 알고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입을 다무니, 기억도 희미하고, 어느새 빈민을 마주해도 그리 교감이 생기지 않았다.
난, 중산층의 아비투스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최규석이 나를 다시 곰팡이 피는 옛날로 인도했다.
'대한민국 원주민'과 '습지생태보고서'를 읽으니 초등학교 동창생을 마주한 기분이다.

육성회비 때문에 바쁜 걸음으로 500원을 꾸러다녔던 할머니의 뒷모습.
보충수업비 2천원을 내지못해 방학중에 밭에서 일하던 나를 불러들여 대신 돈을 내주신 영어선생님.
라이온스 관변단체의 장학금을 꽁꽁 통장에 쟁여놨다가 문고판을 겨우 사서 책장을 메웠던 그시절.
아이들이 부러워하던 교사용 참고서.(선생님들은 가난한 나에게 교사용 참고서를 주시곤 했다)
겨울, 냇가에서 오줌으로 손을 녹여가며 빨래하던 그때.
고기가 고파서 겨울이면 사냥한 역한 토끼고기도 먹어야 했었지.
중학교 학비가 모자라 학교앞 유일한 문방구에서 한 떡볶이 알바.
주산학원에 가고 싶어 바깥을 얼마나 배회했던가(내가 셈이 약한 덴 다 그런이유가 있다)

돌아가라면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땐 그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욕심이 많지 않아 신세한탄을 해보지도 않았다.
사는 건 다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무의식은 머리가 굵으면서부터 자꾸 '가난'을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쿨한 도회녀가 결국, 보여주고 싶은 나였다니 말이다.

오늘은, 자랑할 건 아니지만
곰팡이같은 가난이 밉살스럽지 않게 느껴진다.
애써 '경험'을 앞세우며 덜 가난했던 사람을 주눅들게 하지도
부러 숨겨가며 아닌척 하지도 않는 최규석을 만나 기분이 좋다.

공감이라는 건 그 시간과 경험을 나눌 수 있는데 의미가 있는 게아니라
어떤 시선으로 그 시간과 경험을 바라보느냐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난, 오늘부터 최규석을 친구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