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살기

가정과 국가


어설픈 페미. 나에 대한 그의 비판이다. 명절때 사라지는 문제에 대해 대화하면서 나온 말이다. 걸리진 않는다. 그런평가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더이상 희생하지 않겠다는 나의 선언과 그의 습속이 부딪힌 결론일 뿐이니까. 가족을 사랑하니까 평화스러운 가정을 유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쯤은 거둬들여야 한다는 보편적 윤리관은 더이상 나를 분노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국가가 국민에게 행하는 사랑을 가장한 억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통치자는 국민을 사랑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유지해야할 사명을 강조한다. 따라서 국민은 개개인이 자유롭고 행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쉽게 수긍할 수 없다. 평화유지를 위해 시끄럽게 갈등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조림에 고이 잠들어 있는 꽁치도, 번데기도 골뱅이도 아닌 생명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자유의지를 억압하면 살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당연한 희생이라니.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도전을 받을 때 낯설다 못해 분노하는 모습을 이해 못하는건 아니다. 이해하지만, 인정할 수 없다.

몇년전 엄마는 위암수술을 받았다. 가족들은 말로써 나를 위안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엄마의 수술과 간병과 정신적 고통은 나만의 업이었고 그것이 가족의 평화를 방해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명절, 김장 등 집안 행사는 나의 고통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선거때 나는 양육과 이사를 도맡아 하면서도 선거운동 일정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 당사자의 짜증을 다 받아내면서까지 말이다. 집안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내 개인의 고통따위에 관심두지 않았다. 나는 10년동안 양해받지 못하며 고통속에서도 역할을 해내야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국가는 복지시스템을 굴려가며 참 고생이 많지?라며 달랜다. 하지만 국민 개인을 양해하지 않는다. 통치자가 작동하는 억압적이 시스템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줘야 비로소 내가족, 내국민이 되는 것이다. 이게 사랑인가? 사랑은 아름답지만 사랑을 구조화한 제도는 얼마나 추한가.
나는 고통스러운 요즘을 살고 있으며 조증, 울증의 반복으로 위태위태하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는 그의 지지가 고마웠지만 그건 복지시스템일 뿐이라는게 들통나고 말았다. 왜 하필 명절때인가? 라며 분노하는 모습에서 나의 희생은 조금도 탕감해줄 기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용감한 내게 박수를 보낸다. 화내지 않고 의연할 수 있는 백그라운드는 무엇이었을까? 돈많은 애인도 아니고, 페미니즘 이론도 아니고, 강력한 분노도 아니다. 어느것 하나 의지할 수 없었던 내가, 희생이라도 치루며 편안한 삶을 살아왔던 내가 해머로 평화를 부숴가며 나를 구하려고 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2008년 읽었던 책과 용감한 돌싱들 덕분이다. 강신주씨의 철학, 삶을 만나다와 차이를 횡단하는 장자며, 마광수의 여러권의 책, 그리고 롤랑바르트와 알랭드 보통, 니체, 사르트르. 참 고마운 만남이다. 기억할 수 없는 아포리즘으로 점철된 것들이 나의 삶을 조금씩 돌려놓았다.

질문, 개인이 희생을 거부할때 왜 가족은 평화가 깨지는가. 모인 사람끼리 행복하게 웃고 떠들며 음식을 나누면 안되나? 자기만 생각한다고? 이기주의라고? 나때문에 누가 더욱 희생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는다. 다만 그렇게 살지 못하기때문에 시샘하는 것이다. 나도 그간 시샘했다. 하고싶은 대로 사는 그를 말이다. 그러나 자기 하고싶은 대로 사는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려고 하니, 하고싶은대로 살던 그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다. 여기서 질문, 당신은 그렇게 살아도 되고 왜 난 안되죠?
그 대목에서 그는 말한다. 어설픈 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