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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공부

어둠의 왼손

어둠의 왼손 (양장본)
어슐러K.르귄 저서정록 역시공사(단행본)2002.09.10






'둘은 하나이다. 삶과 죽음은 나란히 누워있으니....'
게센인에게 있어 자살은 엄청난 죄악이다. 자살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선택권의 포기이며 배반 그자체였다. 에스트라벤은 자살했다. 국경에서 쏟아지는 총알을 향해 몸을 던졌다. 왜그랬을까? 그는 무엇을 기대하며 죽었을까? 그의 죽음에 원인은 없다. 결과가 모든 것을 설명할 따름이다.
그는빙하를 건너며 사투했지만 죽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결국 겐리를 남기고 죽었고, 자살같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왕은 에큐멘인들을 어느나라보다 일찍 받아들여 정치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거짓과 위선의 정치를 하던 자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난 한권의 시사주간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1969년에 발행한 이 책은 2009년의 노무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게 무슨 SF소설이냔 말이지. 소설을 줄 그어가며 읽다니. 내원참. 더이상 설명은 않겠다. 다만, 가슴이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뜨끔하기도 한 몇가지 아포리즘을 적어본다.

체면이 정직보다 중요한 것이 틀림없었다.
애국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공포'입니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공포만이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오.
남을 반역자라 부르기는 쉽지만 자기가 그 처지가 되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당신이 왜 추방되었는지 알고 있소. 왕보다 카르하이드(나라)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가 공포와 회유를 통해서 그들이 역사 이전부터 계속해온 삶의 양식을 걷어치우고 문명과 전쟁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고 있음을 알았다.
사람들을 가장 빨리 동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새로운 종교'였다.
국민들을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 보도를 자제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중략, 한마디로 질서는 유지될 것입니다.
그의 둔감은 무지 때문이며, 거만함 역시 무지 때문이다.
권력은 음모를 감추는 법이다.
한 번 권력을 잡았다가 잃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져 가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어떻게든 다시한번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치는 법이다.
판에 박은 듯한 무기력이 음식과 따뜻함,자유의 결핍 탓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보다 특별한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죄수들에게 투입되는 케머(성적발현의 시기, 성적 욕구) 억제제 때문이었다.
빛은 어둠의 왼손이다.


실은 이 소설은 양성사회에 대한 성인지적 관점에서 회자되던 책이다. 케머기간에 남자로도, 혹은 여자로도 성적발현할 수 있는 어느 행성의 이야기로 들었고, 성적 욕망을 중심으로 풀어갔을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읽었다. 그런데 왠걸. 현실사회의 국가주의와 정치를 비튼 부분에 확대경을 들이대고 보니, 페미니즘 SF 소설이라고 장르를 규정하는데 반기를 들고 싶어졌다.

성을 떠난 사랑과 우정의 모호한 경계에서 에스트라벤과 겐리의 관계는 충분히 감동적이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