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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공부

니체처럼 살아가기


'좋음'은 무엇인가. '선'은 무엇인가.니체가 쓴 '도덕의 계보학'을 공부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좋음'의 가치판단을 다시 뒤집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나는 어렸을때 휴지를 열심히 주우면 표창장을 받는 줄 알았다. 학교에서 남이 보든 안보든 열심히 휴지를 주웠다. 그건 '표창장'이라는 사심 때문이었고, 한 학생의그 사심으로 인해 깨끗해진 운동장을 이용하는 타자들은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표창장을 받지 못했다. 나의 이런 이타적 행위를 교사들은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착함'에 상처받았다. 그러면 난 정말 착한 학생이었을까?

니체는 그런 '선함'에 태클을 건다.그는 '비이기적 행위란 이익을 얻는 사람에 의해 '좋다'고 칭송된 것인데 이 칭송의 기원이 잊히면서 습관적으로 좋다고 칭송되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 행위를 그 자체로 좋다고 느꼈다'고 주장한다. 가령 엄마의 사랑을 그 예로 들을 수 있겠다. 자식과 시집살이를 통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더라도 훌륭한 엄마, 훌륭한 며느리로 살아낸 그에게 사회는 찬사를 보낸다. 행위 당사자는 이미 뼛속까지 홧병이 도져 금방이라도 죽을지경인데 당사자 상태는 아랑곳 하지 않고 행위를 받는 사람들에 의해 '엄마'의 착함이 규정되는 것이다.
그럴바에야, 시집살이와 양육의 고통을 덜어주는 행위가 더 인간적이지 않느냐 말이다. 그 엄마의 희생으로 나머지가 행복해지고 그 나머지들의 가치판단 때문에 썩어가는 인간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 엄마또한 마냥 희생자는 아닐것이다. 표창장을 받고 싶었던 나와 타자들에게 칭송받고 싶었던 엄마의 사심은 결코 '좋음'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껏 우리가 해석해온 도덕적 요구가 얼마나 모순인지 이 책에서 낱낱이 밝히고 잇다. 니체는 말한다. '덕을 칭송하는 것은 그 개인에게 해로운 어떤 것을 칭송하는 것이고, 인간에게서 가장 고귀한 자기애와 자신을 지키는 최상의 능력을 빼앗아가는 충동들을 칭송하는 것이다"고.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그러면 '좋음'이란 가치판단부터 다시 해봐야 할 일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이 속아왔다. 근면, 효, 양보, 배려 등등 이러한 단어가 갖는 가치들은 최고의 '선'으로써 우리사회를 지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개인의 철저한 희생이 필요하다. 근면하면 노동자는 병들지만 자본가는 돈을 벌 것이고, 양보하면 자신은 손해보지만 타자는 득을 볼 것이다. 배려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당사자가 아무 사심없이. 그러니까 도덕적인 사람으로 혹은 착한 사람으로 불리워지기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아무생각없이 행하는 것이라면 그것 자체가 선이라는 것이다. 가령, 물에빠진 자식을 구하기 위해 아무 사심없이 물에 뛰어드는 충동적인 엄마처럼 말이다.

그럼 진짜 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산서를 버리라고 한다.가치평가를 다른사람에게 맡기는 '허영심'도 버려야 한다. 후회하고 고백하고 반성할 시간에, 그냥 행하면 되는 것이지.

'선'에 대한 가치판단을 니체식으로 한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라는게 실은 굳건한 사회시스템에게 조롱받고 심지어 심한 공격까지 당할 것이다. 이 시대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추방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강한자는 어떠한가. 추방이 두려워 귀속하지 않는다. 생각을 바꾸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지 않다. 니체를 공부하면서 난 고작 3시간의 강의시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니까. 중요한건 바로 지금 행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해석된 세상에서 난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다. 나의 긍정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의 시작이다. 흥분된다. 매일매일 전쟁하듯 살아갈테지만 강자로 살고자 한다. 진짜 강자는 전쟁도 유머러스하게 치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니체,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당신처럼 사고하겠지만 당신처럼 살지 않고 당신의 사유처럼 살아갈께요. 당신의 삶 자체는 제가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