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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기

환타지는 뽕인가?

환타지에 몸을 맡기는게 훨씬 안정적이다.
적어도, 현실이 견딜수 없을때, 최소한의 매트리스 역할을 해주니까.
촛불집회는 어쩌면 일종의 환타지 일지 모르겠다.
적어도, 미친소문제가해결되면 안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환타지.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안전한가?
우리는 518때 독재정권이 물러나면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여전히 목숨과 바꾼 민주주의 초라하기그지 없었다.
우리는 610때 직선제가 실현되면, 적어도 파쇼는 물러나리라 믿었다.
그러나 여전히 선거기간동안의 안전만 담보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촛불집회는 어떤 안전성을 믿고 우리는 덤비는 것인가?
이명박이 하야하면 끝나는가?
우리라고 표현하면 무리겠고, 적어도 나는 이명박 하야의 환타지로 촛불을 밝히는지 모르겠다. 그 환타지라는 뽕은 약발이 떨어지면 더욱 강력한 약발을 요구한다.
지금의 촛불집회가 혁명, 집단지성이라는 포장을 벗고, 참여하는 개인이 가진 분노의 본질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정말 그동안 나같은 환타지에 불과했다면
이때, 본질을 바라보는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이, 과정에서의 조직된 분노가 나와 사회를 변화할 수 있다. 나의 욕망만 남고 내가 성숙하지 않는다면 이명박 하야가 가져다주는 건 단지,승리의 축배만 남을 것이다.
이명박 하야 후에 제2의 이명박이 나타나면 더 강력한 환타지로 뽕을 맞을거냔 말이다.
우리가 받아할 선물은 탁핵이 아니라, 어쩌면 분노할 수 있고 불복종할 수 있는 우리의 생명력을 지속시킬 수 있는 희망과 상상력의 가능성 아닐까?
나는 다르다고 이야기 하면서 욕먹을 각오를 하는 것이 어른이다.

연애의 환타지에 몸을 맡겼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타자적 자아는 일찌기 외면하고, 욕망만 살아남았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운운하면서도 난 점점 욕망을 실현하는 마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선생과 제자, 스타와 팬, 어른과 미성년, 존경하는 선배와 후배,
강한자와 약한자로 대변하는
수직적 관계에서 노멀한 연애가 당최 가능하단 말인가?
아니, 가능할 것 같은 환타지속에서 나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예의가 있다면, 상대방이 느꼈을 당혹감과 비자발성에 명쾌하게 선을 그어줬어야 한다.
중강간이 강간보다 죄질이 나쁜건,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한 게 아니던가.
관계의 원칙을 30년이 넘도록 지켜왔다. 인간에 대한 예의 말이다.
그러나 환타지는 뽕이 되어 견딜 수 없는 현실의 매트리스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긴 마라톤으로 연장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성의 작동을 외면하고 싶은 건 환타지를 연장하고 싶은 욕망이다.
관계는 일방적일때 폭력이다. 상대가 저항할 수 없는 사람일때 더욱 그렇다.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하는 행위를 이뤘다고 연애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되어주고, 위안이되어주는 건강한 수평적 관계가
진정 연애가 아닐까?
이때, 나의 본질을 바라보는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개인의 욕망은 거기서 끝내야한다.
쓸쓸하지만 감내하는 자가, 어른이다.

오늘만난, 연애의 달인 남자 B는 내뒤통수에 각목을 찐하게 날렸다.
환타지도 날라갔다. 매트리스까지 걷어간 그가 얄미럽지만, 내 혼돈의 본질을
태반꺼내듯 꾹 늘러서 통째로 빼냈다.오랜기간 뱃속에 담아온 태반덩어리가 빠져나갔다. 마초화한 나를 인정하고, 예의를 갖추겠노라고 약속하고 돌아섰다.
그는 조언한다. "한살이라도 더먹은 어른이 해야할 일이잖아"
역시, 거리두기에 능한 사람이다. 나의 연애에 대한 환타지를
이렇게 날카롭게 비판하다니...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내공을 쌓으면 쿨해질 수 있어요"

어른이 된다는 건 정말 쓸쓸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