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지 않았지만 선배들은 내가 희생했다고 생각하는듯 했다. 눈을 바로보지 못하고 이유도 묻지 않았다. 이선배는 "그래, 고생했다. 당신만의 정신세계를 찾아야 당신이 행복해" 라며 정적을 깬다. 한공간서 10년간 활동했던 나는 상근을 접기로 했다.
연애질만 했던 대학졸업후 지금도 외주업체에 결재안하기로 유명한 00문화사라는 출판사에 취직해서 꼴랑 4개월만에 구조조정당했다. 당시만해도 호호할머니될때까지 한직장에서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강박강념이 있었다. IMF전이었기 때문.
백수생활이 불안하여 조울증을 앓다가 을왕리로 자살하러 갔다.된장찌게에 퐁당빠져있는 통통한 조갯살때문에 행복해져서 다시 귀가했다. 자살미수.
빽도절도없고, 경력이라곤 모눈종이에 아날로그적으로 출판편집했던 4개월이 고작. 취업과 거리가 먼 국문학을 전공했으니 갈곳이 마땅치 않았다. 연줄로 제일기획에 프로필을 넣어봤더니 친적아저씨는 잊을 수 없는 쎈 콧김을 품고 돌려줬다. "장난하냐?"
그리고 지역신문사에 취업했다. 너댓달 월급이 밀리더니 사장과 총무언니가 도망갔다. 점집을 차렸단다. 갑자기 사장이 신이 내렸다나? 재판해서 승소했으나 소액재판은 돈 안주면 그만이었다. 나를 눈여겨본 한 신문사에 다시 취직. 박봉에도 지랄같은 열정으로 열심히 일했다. 사랑이랑 일은 공통점이 있다. 시작은 설렘과 흥분으로 날밤까며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식기 마련이고 같은 공간에 있다는것만으로도 괴로워지니 원. 기자는 기생충같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사건과 사람에 기생하는 비주체적인 삶이 싫었다. 바뀌는 것도 없고. 그리고 터닝포인트를 찾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위례시민연대와의 만남.
또다시 사랑을 찾았다. 흥분되서 잠이 안올 지경이었다. 생활한복을 입은 남자들은 내가 그동안 봐온 끈적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소탈하고 여자를 존중하는 사람들. 내가 봐온 사회의 뭇사내와는 정말 달랐다. 그뿐이랴. 여자라고 해서 사무실내에서 대우가 낮거나 커피를 나르는 일도 없다.상사의 옷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주지 않아도되는것. 무엇보다 함께 살기위해 주장하고, 가난해도 창피해하지 않는 삶.
어느 권력이 압박하더라도 주저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이 숨쉬는 이 공간.
낯선 이 매력에 흠뻑 젖어서 토론회며, 보고서며, 각종 회의며, 만나는 사람 한명한명 그냥 놓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나갔고, 난 중견이 되어버렸다.
며칠을 고민하며 뒤적이던 자료없이 한시간 만에 보고서를 뚝딱 쓰기도 하고, 좌충우돌하지 않고도 전화 한통이면 해결되는 일들도 많아졌다.
아무일 하지 않고도 언론사에서는 코멘트를 원하고, 그냥 놀고있어도 사람들은 내가 무지 바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초개인적인 문제로 머리에 손을 얹고 있자면, 사회문제때문에 심히 고민하고 있는줄 착각하는 사람도 늘었다. 점점, 나는 관성화되고 있었다.
내가 참을 수 없는건 사랑이 식었다는 것.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신나게 뛰놀던 이공간이 이젠 시들해졌다는 사실. 공간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사랑이 식어서 더이상 내가 이곳에 존재하는건 단체를 망치는 일이라는 판단이 섰다.
임신한 몸으로 썩은 배추냄새를 가르며 가락시장으로 출근했던 그 한여름.
판기사업을 하면서 단체 운영비를 벌려고 매일같이 자판기 청소를 하던 그때.
생선장수 아저씨들과 조합활동 했던 그때.
비닐하우스촌에서 함께 울고웃고 했던 분들.
이 공간을 스쳐갔던 많은 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
소중한 경험과 만남이었다.
참 자유롭다는 생각 오랜만에 해본다.
난, 사람을 매몰차게 차본적이 없듯이, 힘들때가 있었지만 그만둔다는 말은 꺼내보지도 못해왔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팔랑이지 않는거라고.
10년이면 된거다. 나도 그렇고 동지들도 그렇다.
앞으로 뭘할까?
글쎄. 12월이후에 뭔가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겠지.
이왕이면 정말 재미난 일이었음 좋겠다.
연애질만 했던 대학졸업후 지금도 외주업체에 결재안하기로 유명한 00문화사라는 출판사에 취직해서 꼴랑 4개월만에 구조조정당했다. 당시만해도 호호할머니될때까지 한직장에서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강박강념이 있었다. IMF전이었기 때문.
백수생활이 불안하여 조울증을 앓다가 을왕리로 자살하러 갔다.된장찌게에 퐁당빠져있는 통통한 조갯살때문에 행복해져서 다시 귀가했다. 자살미수.
빽도절도없고, 경력이라곤 모눈종이에 아날로그적으로 출판편집했던 4개월이 고작. 취업과 거리가 먼 국문학을 전공했으니 갈곳이 마땅치 않았다. 연줄로 제일기획에 프로필을 넣어봤더니 친적아저씨는 잊을 수 없는 쎈 콧김을 품고 돌려줬다. "장난하냐?"
그리고 지역신문사에 취업했다. 너댓달 월급이 밀리더니 사장과 총무언니가 도망갔다. 점집을 차렸단다. 갑자기 사장이 신이 내렸다나? 재판해서 승소했으나 소액재판은 돈 안주면 그만이었다. 나를 눈여겨본 한 신문사에 다시 취직. 박봉에도 지랄같은 열정으로 열심히 일했다. 사랑이랑 일은 공통점이 있다. 시작은 설렘과 흥분으로 날밤까며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식기 마련이고 같은 공간에 있다는것만으로도 괴로워지니 원. 기자는 기생충같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사건과 사람에 기생하는 비주체적인 삶이 싫었다. 바뀌는 것도 없고. 그리고 터닝포인트를 찾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위례시민연대와의 만남.
또다시 사랑을 찾았다. 흥분되서 잠이 안올 지경이었다. 생활한복을 입은 남자들은 내가 그동안 봐온 끈적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소탈하고 여자를 존중하는 사람들. 내가 봐온 사회의 뭇사내와는 정말 달랐다. 그뿐이랴. 여자라고 해서 사무실내에서 대우가 낮거나 커피를 나르는 일도 없다.상사의 옷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주지 않아도되는것. 무엇보다 함께 살기위해 주장하고, 가난해도 창피해하지 않는 삶.
어느 권력이 압박하더라도 주저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이 숨쉬는 이 공간.
낯선 이 매력에 흠뻑 젖어서 토론회며, 보고서며, 각종 회의며, 만나는 사람 한명한명 그냥 놓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나갔고, 난 중견이 되어버렸다.
며칠을 고민하며 뒤적이던 자료없이 한시간 만에 보고서를 뚝딱 쓰기도 하고, 좌충우돌하지 않고도 전화 한통이면 해결되는 일들도 많아졌다.
아무일 하지 않고도 언론사에서는 코멘트를 원하고, 그냥 놀고있어도 사람들은 내가 무지 바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초개인적인 문제로 머리에 손을 얹고 있자면, 사회문제때문에 심히 고민하고 있는줄 착각하는 사람도 늘었다. 점점, 나는 관성화되고 있었다.
내가 참을 수 없는건 사랑이 식었다는 것.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신나게 뛰놀던 이공간이 이젠 시들해졌다는 사실. 공간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사랑이 식어서 더이상 내가 이곳에 존재하는건 단체를 망치는 일이라는 판단이 섰다.
임신한 몸으로 썩은 배추냄새를 가르며 가락시장으로 출근했던 그 한여름.
판기사업을 하면서 단체 운영비를 벌려고 매일같이 자판기 청소를 하던 그때.
생선장수 아저씨들과 조합활동 했던 그때.
비닐하우스촌에서 함께 울고웃고 했던 분들.
이 공간을 스쳐갔던 많은 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
소중한 경험과 만남이었다.
참 자유롭다는 생각 오랜만에 해본다.
난, 사람을 매몰차게 차본적이 없듯이, 힘들때가 있었지만 그만둔다는 말은 꺼내보지도 못해왔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팔랑이지 않는거라고.
10년이면 된거다. 나도 그렇고 동지들도 그렇다.
앞으로 뭘할까?
글쎄. 12월이후에 뭔가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겠지.
이왕이면 정말 재미난 일이었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