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한잔이 땡길것 같아서 장을 보며 한캔 사두웠던 맥주캔을 땄다.
잠을청해도 자꾸 침대를 부유하는 내영혼을 눕힐 수 없어 술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다.
꿈꿀때 행복하다가, 지금 이자리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면 흠칫 놀란다.
지금의 나도 나쁘지 않다는걸 알면서도. 갑자기 에너지가 가라앉는다.
나쁜징조는 아니다. 드디어 나를 마주하는 신내림과 같은 시간이니까.
이때 억지로 잠을 청하면 안된다. 통으로 잃어버리면 손해기 때문.
눈을 감아보았다.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첫사랑을 만나는 상상이 그려진다.
이때 시청앞지하철역에서라는 노래는 필수다.
상상이 가능하다는건 이뤄질 수 없다는 뜻이다. 건 경험에서 알 수 있다.
계획대로 딱 맞아떨어진 삶이란게 당췌 가능한 적이 있었던가.
다양한 경우의 수를 두고, 상처를 덜받기 위해 자기방어를 마구 해대면 모를까.
눈을 떴다. 웃긴다. 진실과 거리가 먼, 줍고싶은 추억만 보듬고 오랜시간 영향을 받는다는건, 정신건강에도 안좋다. 지금 이자리. 그리고 나.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시원하다.
이글로바의 집착없는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조용하고 나른한 깊은밤을 놓치고 싶지 않아 모닝페이지쓰듯 짓껄여본다.
난 어쩌면 어릴적 부터 친구를 놓고 수다떠는것 보다 종이를 놓고 수다떠는게 익숙한듯 하다. 짓껄이면 조용하다. 내가 지금 뭘 이야기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욕실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본다.
여드름자국이 가시지 않은 붉은 얼굴, 검고 짧은 머리.
거친 바위처럼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얼굴이 나를 보고 베시시 웃는다.
넌, 꿈이 뭐였더라. 지금 뭘하고 있는거지? 너의열정은 어디에 녹아있는거지?
갑자기 변씨의 사주풀이가 뇌리를 차갑게 스친다.
"당신 사주엔 화가 없고 쇠만 있으니, 연애는 꿈도 꾸지 마시고 그 에너지를 창조적인 일에 사용하시오" 이런, 천형과 같은 말이 왜 이때 떠오르는거지?
참 기특한 얼굴이다.
만져보았다. 좌충우돌하며 고민하고 방황했던 그 날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 얼굴이 오늘따라 왜이리 안쓰러운지. 술기운 때문이가? 고작 맥주 한캔에?
강렬히 복원하고 싶은것들.
홀로 밤새며 원샷하우스에서 고독을 씹던 시간.
입다물고 상상만으로 날밤새며 석고상처럼 의자에 앉아있었던 시간.
절에 가서 낯선 스님들 사이에서 연등 만들던 시간.
의림지 호수를 홀로 빙빙 돌며 미친년처럼 쏘다니던 시간.
나이트 코너주인 언니와 밤새 폭력남편을 성토하며 함께 울던 시간.
아무리 혼자있는 시간이 흘러도 아무에게서 잔소리가 없던 시간.
그 시간을 아무에게도 무용담처럼 이야기 하지 않던 진지했던 시간.
어쩌면, 절망이라고 느꼈을 그 시간이 간절히 나를 원하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철들기 전이었겠지.
그 시간을 복원할 수 있을까?
너무 먼길을 돌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시간을 복원하려고 하다니.
날것의 나를 만나면 간절히 그 고독한 존재로 살기를 원한다는걸 안다.
너무 노멀한 삶이 행복에 겹다고 비난한다면 할말없다.
편안한 삶은 내게서 깊은 내면을 읽을 줄 아는 시야를 앗아갔으며
음울하지만 나름 아름다웠던 정서를 지워버렸다.
누가 시키진 않았지. 그건 어쩌면 멍청하게도 계획한 대로 살려고 아둥바둥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가 알려준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쫓아서 말이지.
맥주한캔.
아침이면, 난 또 노멀한 하루를 맞이하겠지.
식탁에 뒹구는 캔을 구겨서 재활용통에 골인시키고 말이지.
그래도 지금 이순간. 난 잠시라도 고독한 그날을 복원하고자 한다.
도대체, 넌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