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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기

자매애


남자와 여자가 만났을때, 모든 암컷과 수컷이 이성애를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성애를 느끼는 사람끼리만 만날 수 없는 것이 현대사회다. 그러니까 동물세계나 원시공동체처럼 번식만을 위해 눈을 부라리고 수컷을 찾아 헤매는 하이애나가 될 수 없는 일이다. 생식과 번식을 고려하지 않고도 동지적 만남, 우정의 만남, 그저그런 만남 등 다양한 관계의 색깔이 있다. 이성애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말이다. 어떤 수컷에게는 10점 미만의 이성애, 그러니까 자매애에 가까운 느낌이 있고 어떤 수컷에게는 90점 이상의 이성애를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10점과 90점의 관계의 농도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콧소리를 하느냐 안하느냐, 혹은 교태를 부리느냐 안부리느냐, 혹은 외양을 조심하냐 안하냐 등으로 구분하면서 섹스의 가능성 등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다를 뿐.

나는 또 한명의 자매를 휴먼네트워크 목록에 넣었다. 워낙 소량다품종으로 관계망을 형성하는지라 한 모둠에서 한명, 혹은 두명정도와 인간관계를 맺는다. 수컷의 경우만 놓고 봤을때, 대부분 이성애지수가 그리 높지 않은 경우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0점들은 없다. 최소한의 매력조차 못느낀다면 애초에 만나지지도 않는다. 그의 닉네임은 내가 다시 지어줬다. '인디고'
인디고는 남청색이다. 주의력결핍장애군과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인디고 아이들은 특별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혼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왜 그가 인디고인지 3분안에 판명이 난다.

"한강에는 물고기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아, 그래요? 그럼 그곳에 가봅시다"
"자, 보세요 한강 바닥을 비추는 거울을 보면 물고기가 다니는걸 볼 수 있습니다"
"게가 보이네요. 나머지는 다들 어디에 갔을까요?"
"인디고군, 저는 소소한 시련들을 이 한강에서 견뎠답니다"
그러면서 나는 구구절절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했다. 한참을 이야기 하는데 반응이 없다. 옆을 보니 인디고 군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야아~ 헬리콥터다"

자전거를 나란히 타면서 구구절절 수다를 떨었다.
"당게가 시끄럽지요? 이제는 좀 전후사정을 알것 같으세요?"
"그럴 에너지가 있다면 손씻고 발닦고 집에가서 섹스들이나 하실 일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사람 갈구는 에너지 대단하지요?"
"아무래도 에너지가 다 머리로 뻣쳐 오르는 사람들인가 봐요"
"인디고군 말이 맞아요. 그러니까 ~~~~~~~"
그러면서 나는 또 진보정당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한참을 이야기 하는데 대답이 없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뭔가를 하고 있는것 아닌가. 자전거 도로에 버려진 빗자루를 주워서 언덕으로 던지는 인디고군.
결국, 나는 독백의 수다를 떠든 셈이다.

나는 인디고군의 산만한 대화방식을 이어가기 위해 3분에 한번씩 쉬어주거나 확인해야 했다. 대화하다말고 지나가는 반려동물들에게 말을 걸거나, 지나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거나,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영혼은 인디고가 분명함을 확인했다.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라도 3분이상을 집중하지 않는 인디고.

잠실대교밑. 어쨌거나 내가 싸온 김밥을 펼쳤다. 역시나 옆구리가 다 터져있었다. 멸치,참치,스팸,김치김밥을 차례로 먹었다. 샐러드에 과일까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기특하다. 나는 이런 도시락에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침을 꼴깍 삼키며 칭찬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
"마돈나님, 어디선가 생선 비린내가 나는데요?"
"글쎄 저는 괜찮은데, 아하~ 멸치김밥 때문인가봐요?"
"제가 후각이 예민합니다. 눈이 잘 안보이니까 말이지요"
"그럼 생선은 안드세요?"
"아뇨. 가리는거 없습니다."
그렇잖아도 며칠전 잠실대교 밑에서 접선했을때 향수를 뿌렸냐고 내게 물었었다. 냄새가 난다고, 난 그날 체육복 차림이었고 누구를 만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향수같은 건 뿌리지 않았다. 스킨냄새 정도 났을라나? 이렇게 후각이 예민하다면 이빨이라도 안닦고 만나는 날엔... 에효~ 끔찍하다. 


성수대교에서 유턴하여 신성호프집으로 갔다. 운동후의 맥주맛을 어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으랴. 메마른 식도를 톡톡 쏴주며 염통으로 흐르는 그 맥주의 맛. 맥주 한입 마시고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 말이 별로 웃기지도 않는데 인디고는 맥주의 역류 때문에 얼굴이 시뻘개졌다. 하마터면 탁자에 다 쏟을 뻔 했으나 힘겹게 조절하고는 다시 대화에 들어갔다. 역시나.

대화하다말고 하품하기.(술을 잘 못마신다. 산소부족이란다) 는 김샌다. 하지만 인디고임을 인정했으니 나는 3분에 한번씩 하품을 허용한다. 맥주집은 폐쇄되어 있어 한강보다는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주의를 끌만한 것들이 별로 없었으니까. 또 대화하다 말고

"마돈나님 몸에서 냄새가 나요"
"담배냄새요?"
"아뇨. 그냥 좀..."
"나 오늘은 씻고 나왔는데? 향수냄새 민감하신거 같아서 향수도 안뿌렸는데?"
"그러니까 그런 종류는 아니고요. 달콤한 냄새요"(휴~ 일단, 다행}
"학창시절때 분유냄새 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래요? 페로몬 냄새인가?"
"페로몬 냄새는 씻지 않을때일수록 강하게 느끼거덩요?"
"설마 씼지 않은건 아니신건지"
(한대 맞고 싶은게로군요)

인디고군. 그의 코는 개코다.호르몬 냄새까지 흡입하는.쩝.

인디고군과 나는 자매애를 폴폴 느끼며 각자의 연애사를 풀어놓았다. 역시 인디고군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특별한 사랑, 특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고 턱이 아플정도로 웃었다. 턱빠지게 웃고 맥주탄산 코로 뿜어내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비틀거렸다고는 하나 고작 인디고군은 750cc를 마셨을 뿐이다. 술값은 정말 아낄 수 있을듯.

다음주에는 한강에서 자전거는 조금만 타고 돗자리깔고 커피 마시면서 남은 수다를 떨기로 했다.
물론 3분에 한번씩 확인해야 한다. 그가 없어지거나 딴생각하거나, 딴데를 쳐다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인디고 군은 마지막 한마디했다.

"제가 이래서 여자친구들과 잘 안되는 걸까요?"
"글쎄, 대화가 길어지면 재미는 없겠죠? 화가나서 한대 줘패고싶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