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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기

설악산 마지막 겨울산행


사람.
둘은 어색하고 다섯은 너무 많다. 셋이나 넷이 딱 적당. 힘든 산행이나 긴 배낭여행은 효도관광과 달라서 관계의 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팀웤이 맞지 않으면 힘들기 때문이다. 준비철저한 만수형, 부지런한 경희언니, 나가서는 공주인 나는 셋이서 마지막 겨울산행을 떠났다. 봄날의 따뜻한 햇살, 녹지 않은 눈, 계획한 일정대로 딱딱 들어맞는 시간.
비박을 계획한 젊은 청년과 젤리도 나눠먹고, 애큐매니컬을 연상케하는 교회목사님들. 간혹 눈에 띄는 나홀로 산행자. 무엇보다 지난 연구공간 수유너머 현장인문학 세미나에서 만났던 어떤 분을 소청대피소에서 만날 줄이야.
산은 작은 세계같았다. 휴식하면서 정들만 하면 다시 만나지지 않고 우연히 어느 봉우리에서 조우하기도 한다. 만나고 보내고 수도없이 반복하면서도 서로에게 친절하되 밀착하지 않는 그런 만남. 산에 있었다.

한계령.
심장이 터지는줄 알았다. 그렇잖아도 내가 속해있는 산악회 이름이'호흡곤란'인데 말이지. 내리막은 없고 계속 올라가야 하는 첫날 오전산행. 말많은 우리가 침묵으로 일관. 콧물눈물닦아내며 지쳐 쓰러질라 치면 간식시간. 만수형이 사온 말린 망고는 쵝오! 경희언니가 싸온 커피를 즐기며 걷다보니어느덧 대청봉이다. 중청산장에 예약을 못했다. 자리야 남겠지만 소청도 좋다고 하니 힘들더라도 더 기운내서 가보았다. 역시. 소청은 우리들만의 오븟한 방을 내주었다. 따뜻한 방에서 트렁크만 입고 주무셨다는 신모군. 형이 사온 발렌타인을 뚜껑에 홀짝이며 별도보고 님도보고(?) 뽕도 따는 일석삼조의 시간. 산장에서의 밥은 또 왜이리 맛있던지. 하얗고 고실고실한 쌀밥에 된장으로 비벼먹고 옆사람에게 소고기도 한점 얻어먹었다. 캬.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첫날 밤은 저물어갔다.

눈썰매
하산은 쉽지 않다. 눈이 녹지 않아 아이젠을 하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 당장 입산금지가 될 예정이어서 그런지 등산객이 많았다. 하산이라... 우리는 각자 깔개를 엉덩이에 대고 눈썰매를 타고 하산했다. 브레이크 없는 눈썰매는 경희언니를 골로 보낼뻔 했다. 헬기가 뜰뻔했으나 엉덩이가 무거우니 급정거. 각종 근육이 파열되어 아파왔으나 눈썰매하산은 우리의 도착예정시간을 앞당겨 주었다. 비선계곡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어제와 풍경이 전혀 달랐다. 산수화를 연상케하는 바위산틈틈이 소나무가 멋드러지게 자리잡고 있었다. 옥색 계곡물은 금방이라도 풍덩 빠지고 싶을 정도로 유혹했으나 겨울이라 참았다. 1박2일 찍는것도 아니고 아무리 노는걸 좋아하는 우리지만 참자.

대포항 해덕이네
비선계곡에서 만난 아주머니께서 알려주셨다. 해덕이네가 자연산 활어가 많고 잘해준다고. 우리는 소공원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타이밍이 어찌나 잘맞는지. 앞에서 차를 기다리던 사람은 버스가 안온다고 택시타고 가버렸는데 우리는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버스도착. 바글바글한 대포항 입구를 한참 지나가니 한산한 횟집들이 있다. 그곳이 진국인듯. 해덕이네를 찾아갔다. 신모군이 쐈다. 저렴한 가격에푸짐한 회를 입이 터져라 상추에 싸서 오물오물 씹으니 소주가 절로 넘어간다. 그리고 수다.

철인5종.
신대장, 경희영선 스탭으로 구성된 모임을 조직키로 한다. 누가 조직가 아니랠까봐. 설악산행을 기점으로 우리는 효리복근만들기를 위한 운동모임을 하고자 잠깐 논의 했다. 마라톤, 수영, 자전거, 찜질방, 집회, 등산 등으로 5종 경기모임을 만들되, 홍보 안하고 애써 꾸리지 않고 그저 일정만 알리면 그날 참여하면 그만. 여름에 남자는 쫄티, 여자는 탑을 입고 코넷 모임을 갖는 걸 목표로 말이지.

간만에.
행복했다. 10년전 지리산행이 너무 힘들어서 겁을 잔뜩 먹었는데 신대장의 탁월한 완급조절로 힘들지 않게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처음은 다 설레나 보다. 설악산의 첫경험. 산장의 첫날밤. 너무 좋다. 편한 잠자리 ,편한 여행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는데, 불편한 행복이 주는 묘미가 이런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양치도 제대로 못하고 세수도 못했지만 우린 뭐가 그리 행복하지 연실 낄낄거렸다. 소청산장의 냉장고며 발렌타인, 코펠에 끓여먹는 라면과 밥.
그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이번 산행은 행복했다. 날씨면 날씨, 먹을거리면 먹을거리, 우리들의 호흡이면 호흡 뭣하나 뺄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