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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기

불로소득


오늘은 노동부 고용안정센터에 방문하는 날이다. 공식적 백수인 나는 한달에 명함 두장을 구직노력의 증거물로 제출해야 한다. 지난달에 만났던 일용직 할아버지께서 또 내 앞번호에서 상담받고 있었다. 짜증섞인 상담원의 말.

"그러니까, 구직활동을 했다는 증거물을 제출하셔야 급여를 받으시죠"
"... ..."
"그냥 오시면 안되요. 네? 제 말 잘 알아들으셨죠?"

할아버지는 게면쩍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채 돌아갔다. 나는 괜시리 상담원의 태도에 욱해서 항의하려다가 대책없는 오지랖을 참았다. 운전도 해야하고, 실은 이런식으로 나서는게 다 귀찮아서였다. 하지만 나한테도 저런 태도를 보인다면 걍~ 날려버릴테다 맘을 먹고 데스크앞에 앉았다.
"자아, 구직수첩 주세요"
"여기요. 그리고 명함도 여기 있어욤"
맘은 강하게 먹었으나 마치 그 상담원과의 관계가 급여에 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무의식 때문인지 난 고분고분하게 대꾸했다. 5분도 채 안되서 상담이 끝났다. 아싸~ 오늘저녁이면 한달치 실업급여가 입금될 것이다. 활동비보다 많은 급여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볍다. 맞다. 그 할아버지... 잊어버렸다.

용인으로 향했다. 93.1 클래식 방송 개국기념 방송을 크게 틀고 엑셀을 밟았다. 라디오 디제이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를 읊으며 오늘날씨에 대해 멘트를 날린다. 노고지리 우지지면 좋지 뭘그래. 쿨럭. 핸들도 어쩜 요리조리 잘 돌아가는지. 차도 시원하게 빠졌다. 날도 좋다. 우중충한 도심 개나리와 비교되지 않는 중부고속도로의 개나리가 환하다. 기분이 점점 업된다. 오늘은 엄마 퇴원일. 두달간의 지루한 입원을 마치고 드디어 퇴원이다. 두달전, 정말 엄마가 없어졌다면 좋겠다고 맘먹었던 그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씩 나온다. 나도 참 게면쩍었다. 입원실 문을 여니 엄마는 축하인사 받느라 분주했다. 침대위에 쌓인 짐을 보니 왠만한 이삿짐 수준이다. 참 이상한건 독거노인의 그런 특성이다. 집도 좁은데 짐을 바리바리 쌓아놓고 누가 공짜로 주면 썩어문드러질때까지 저장해놓고 있다. 더이상 잃을게 없을것 같은데 물건에 집착을 많이 한다. 물론 돈에도. 엄마는 각종 김치통과 음료수병, 이불, 옷 등등 싸그리 버렸으면 좋을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놨다.

기운쎈 딸을 뒀으니 망정이지 그 많은 짐을 어떻게 옮기려고 그랬는지. 간호사용 수레를 빌려서 짐을 옮겼다. 의사는 내얼굴좀 보자고 기다리고 있다. 간단한 인사를 했다. 물론 난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도 썩소를 날렸다. 난 엄마의 입퇴원이 반복되면서 의사들한테 시니컬해지곤한다. 자식보다 친절하게 '할머니, 할머니'하면서 살갑게 굴기 때문이다. 니네 엄마였어도 그랬을까?

그이름도 유명한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약천 남구만 사당에 도착. 한식을 앞두고 사당을 둘러보러 종친회 임원과 삼촌이 방문했다. 한결 좋아진 엄마를 보며 두 사람은 안도한다. 정말 불쌍한 할머니 대하듯 친절도 하다. 난 썩소와 함께 식혜를 대접했다. 그리고 삼촌은 지갑을 만지작 거리더니 얼른 내게 수표몇장을 건넨다.
그토록 애증으로 점철된 삼촌과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던건 손내밀지 않는 유일한 조카라는 이유였다. 난 새침한 표정으로 돈을 거절하려고 했는데~~~~ 벌써 손이 가있었다. 쿨럭.
10만원권 수표가 무려 3장. 자존심이고 뭐고. 그 순간 파노라마처럼 돈쓸궁리들이 지나간다. 일단, 이 돈이면 어디로 뜰 수 있을 것인가. 토현이랑 여행갈까? 아니면 엄마의 병원비로 인해 빵구난 재정을 메꿀것인가. 오늘 바로 외식으로 돌입할 것인가. 아니지아니지. 일단 이 돈은 꽁꽁 숨겨뒀다가 여행가야지. 아니지아니지 그동안 얻어먹은 친구들을 모아서 맛난거 사줘야지. 아니지아니지.......

여하튼, 지갑을 보니 훈훈하다. 역시 돈은 있고 볼일이다. 봄날의 햇살이 왜이리 따사로운지. 아파트투기도 아니고 로또당첨도 아닌 불로소득이라. 이 얼마만에 맛보는 행복이란 말인가. 공돈은 반드시 쓸일이 생긴다는 재수없는 징크스도 잊고, 병원비 대비 불로소득을 합치면 마이너스일뿐이라는 날카로운 현실도 잊고, 그간 삼촌에 대한 애증도 좀 잊고 그냥 행복해해야징.

내일은 강의도 있고, 교육도 받는다. 꽤 여러사람을 만난다. 이 기분대로라면 내일 화장빨좀 먹힐것 같다. 구석에 박아둔 렌즈도 좀 찾아두고, 빵꾸난 레깅스도 꿰매야겠다. 이왕이면 불로소득도 있고 하니 큐티클좀 제거하고 세수도 박박해야징. 결국, 그 불로소득에 한푼도 손을 대지 않았지만 그냥 뿌듯한건 왜인지. '돈'이란놈 존재자체로 이렇게 허허실실 하는 나. 속물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