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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동부칼럼 - 한국사회에서 가난뱅이로 산다는 것

한국사회에서 가난뱅이로 산다는 것


마쓰모토 하지메가 지은 ‘가난뱅이의 역습’이라는 책이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재활용가게를 운영하는 저자는 갈고 닦은 노속의 기술을 전파하는가 하면, 당당하고 재미나게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기술했습니다.

비자발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 덩그러니 던져진 우리들에게 ‘가난’이란 천형 이상의 두려움 그자체입니다. 자본은 곧 ‘선’이고 가난은 곧 ‘악’인 사회에서 ‘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자발적 가난이라고 하면 마치 가난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가난한 자가 가난을 인정하고 나름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자발적 가난에는 묘한 저항의 코드가 숨어있다고 하겠습니다.

영주가 지나갈 때 엎드려 절하는 노예가 방귀 끼며 조롱하는 것과 같은 저항의 뜻이 있는것이지요. 반란의 의미도 있습니다. 무일푼 하류인생이지만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그 자체가 착취로 힘을 갖게된 자들에 대한 심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구의회 의원선거에도 출마한 바 있습니다. 이른 바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기 위한 결정이었지요. 낙선했지만 가진 자들의 잔치인 정치에 브레이크를 거는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노 전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여권의 누구는 ‘사변’이라고까지 격한 표현을 쓰더군요. 모든 국민이 슬픔과 미안함으로 힘든 6월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추모객들의 눈물은 그저 슬픔뿐은 아닐겁니다. 노정권과 이정권의 비교에서 나온 분노의 에너지가 분향소로 발길을 옮기게 만든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필자는 더 이상 슬픔에 목이 잠겨 괴로워할 시간이 없습니다. MB정권이 소통의 문을 열 수있도록 국민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분노하고 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 때문에 죽어간 사람이 있습니다. 무차별적인 재개발 정책으로 인해 가난한 자들이 생존터전을 잃고 목숨까지 잃은 상황에서 정부는 아무런 사과나 변명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지난 6월4일에는 유가족 5명을 연행하기도 했습니다.

시체 5구는 순천향 병원 장례식장에서 냉동된 상태로 매일 수백만원씩 빚을 지고 있습니다. 냉동실 사용료만 해도 3억이 빚입니다. 모두 유가족의 몫인 셈이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무슨 죄냐고 유가족이 항의하니까 한 경찰이 그랬다는 군요.

“가난한게 자랑입니까?”

경찰의 무관용 원칙은 미사를 보던 신부님까지 용역을 대동해 폭행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두환 정권때도 없었던 일이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북핵관련 뉴스로 인해 묻힌 가난한 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가난뱅이의 역습’처럼 발랄하게 저항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고민하다가 생각을 접었습니다. 최소한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생명에 대한 위협은 없어야 발랄해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잘 산다는 것’은 제대로 분노하며 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족이 아닌 분노의 표출입니다. 그 방식이 재기발랄한 반란이면 좋겠습니다만, 아무 시민이나 심지어는 외국인 관광객까지 폭행하고 연행하는 국가에서 언간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일겁니다.


용산참사 유가족이 언제쯤 장례를 치를 수있을까요? 우리는 참 답답하고 힘든 6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10일은 명박산성 1주년이 되는 날이군요. 소통의 단절, 공포정치로 대표되는 현 정권이 국민의 역습을 어떻게 견뎌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도 잃고, 꿈도 잃고, 돈도 잃고, 생명도 잃어가는 한국사회가 참 싫어지는 6월입니다.


우리를 구할 것은 ‘분노’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