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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기

추억, 좋아하시네


불가피하게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 갈때, 난 오늘 하루 한끼 잘 때우겠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든다. 언제부터인가 난 축의금이나 조의금 봉투를 내밀자마자 식당으로 직행한다. 결혼식장은 거의 가지 않는다. 내가 아니래두 축하해줄 사람 많고 그리 결혼이라는 제도로의 진입을 감축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례식장은 아는 분일 경우 꼭 찾아가려고 노력한다. 다만, 한곳은 화려한 부페인 반면 한곳은 어딜가나 육개장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메뉴가 좀 찜찜할 뿐. 또 언제부터인가 난 육개장도 정들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내가 학교운영위원으로 있는 초등학교 총동문회 회장 취임식이었다. 학교장은 학부모와 교직원을 대동하고 행사시작 2시간전에 장소에 도착해버렸다. 부페에서 행사를 한다기에 주섬주섬 따라나섰다. 점심을 걸렀다. 일단, 저녁에 푸짐하게 먹기 위해 창자를 좀 비워놔야 했다.(이럴땐 머리가 잘돌아간다)

행사시간을 잘못 안 교장샘 때문에 우린 멀거니 두시간을 행사장에서 앉아있어야 할 지경이다. 아, 그런데 우째 이런일이. 밥부터 먹고 행사를 시작한단다. 이런 신통방통한 행사진행순서는 누가 짰을꼬. 난, 함께 간 언니들을 살살 간질러서 체면이고 뭐고 있는거 실컷 먹자고 제안했다. 냉장고의 맥주도 서너병 꺼내오고 첫타자로 방금 끓여낸 음식들을 접시에 담아 날랐다. 우왕~ 신난다. 기본 네접시의 신화는 깨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훈제연어와 문어숙회로 한접시를 해치운 후, 다음엔 좀 찐덕한 닭염통꼬치구이, 갈비, 튀김, 잡채 종류들을 먹는다. 세번째는 1차 후식으로 떡과 케잌 과자 등을 먹고 네번째는 드디어 맥주와 함께할 닭요리, 과일을 먹는다.

허겁지겁 먹고 나서 본행사에 들어갈때는 우아하게 집중하자고 했다. 역시나 손님들이 오기도 전에 우리는 네접시를 말끔히 비우고 우아하게 앉아서 행사를 구경했다. 동문회장은 10년전부터 나와 알던 사이다. 그는 학교내빈석으로 인사하러 오더니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여긴 어떻게..."
"학운위거든요"

구의원, 시의원, 구청장도 인사한다.
"아니 마돈나께서 여긴 어떻게..."
"학운위거든요"

예상은 했지만 기자생활이나, 시민단체 활동하면서 알게 된 의원들을 만나니 기분이 야리꾸리하다. 이젠 평범한 백수일 뿐이고, 난 맛난 음식을 먹으러 왔을 뿐이고, 적당히 아는척을 하지 말아줬음 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뭐 배도 부르겠다. 넉넉하게 웃음 한방 날려줄밖에.

드디어 동문회장의 취임사가 이어졌다. 눈을 지그시 감고 옛날 학교주변의 청정했던 자연을 되새기고, 광나루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개발로 인해 그 추억들이 사라져가는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참가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학교 동문들이다 보니 자신들도 각자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었을 터. 어린시절 뛰어놀던 동네를 생각하며 그때가 좋았다라고 말한다.

니미럴. 개발은 누가 주도했는데. 가진자를 위해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작품이 개발 아니던가. 이렇게 동문모임에 기를 쓰고 참여하는 것도 정치적 연줄을 이용하여 뭐 한자리 해먹거나, 개발을 앞당겨 이익을 보겠다는 심산으로 앉아있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좀 역겨웠다. 그자리에 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뉴타운 개발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지역유지로서 동네에서 뽑아먹을 거 다 뽑아먹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 굳이 동문회를 유지하려는게 후학을 위해서인가? 절대 아니라고 본다.

우리학교 교장샘도 축하 한마디 날려주신다.
"지금 학교는 재건축 중이며 아주 좋은 공간으로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될겁니다"
그렇다. 학교는 재건축 중이다. 그래서 넓은 운동장이 사라졌다. 

네접시나 먹었겠다, 지루한 행사를 다 볼 수 없었다. 난 이핑계저핑계 대고 일찍 자리를 나섰다.
아참, 선물도 있었지, 난 우산도 받아 챙겨들고 집으로 왔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히 따르면서도 가난한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그러면 그렇게 가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개발 덜하고, 돈 덜벌고 살면 될것이지, 왜 추억만 하는가 말이다.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아예 '점점 돈벌게 되서 기분좋아요. 앞으로 우리 동문들 부자됩시다' 라고 말하는게 더 솔직한 거 아닌가?
아니면 '동문회 열심히 참여하셔서 꼭 구의원 되세요~' 라든가 말이다.

그자리에 모인 사람중에 밥먹으러 온사람 나 빼고, 그냥 운영위원이니까 온 언니들과 교직원 뻬고 아마도 많은 이들은 학맥을 통해 뭔가 이익을 보겠다고 온 사람들 뿐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