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튕기던 언어들이 어느새 그사람 가슴팍에 꽂혔나보다.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던지는 언어가 마구 쏟아지는 다트화살이 된다는 걸 안다.
이해할 수 없으면서 최대한 진심을 다하는 모습이 아련하다.
단호하고 엄하지 않게 최대한 따뜻하게 말하려고 하지만, 본질은 이미 냉정하다.
그러게, 왜 10년동안 듣지 않았나요?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듣지 않았다는 원망도 없다. 그냥 관심사밖에서 성을 돌던 내가 이젠 성안을 궁금해하지도 성밖서 부유하는 삶을 살지도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다. 트렌치 코트 깃을 잔뜩 세운채 말이다.
가을에 단풍구경이나 갈까?
왜 10년동안 등뒤에서 노는 우리를 보지 못했나요?
화장실 문을 연채로 일을 보다 눈이 마주친다.
'피식' 웃는다. 배설물 냄새도 역하지 않은 친밀감은 그대로인데 같은 방에 누워있는게 낯설다. 참회하듯 웅크린채로 등뒤에서 소통하려는 그.
나의 닫힌 차크라는 점점 싸늘할뿐이다.
냉온탕을 오가는 동안 심근은 강화하겠지만, 복잡한 정신은 깨진 계란처럼 풀어진채 악취만 풍길뿐.
투쟁으로 지금까지 왔잖아. 이건 당신의 투쟁의 결과야.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안돼?
당신은 사용자고, 난 피고용인이었던가요? 부부관계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해석하다니. 가부장사회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게 "투쟁하며 하나씩 개선하라"는 충고를 하신다면,
냉정해진 죄책감에 괴로운 일말의 '정'을 거두고싶군요.
하루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