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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기

선한 가치의 이면 '베풀다'

도울 마음이 생긴다는 건 자신이 도울 능력이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한다는 뜻이다. 재물이나 마음, 기술 등. 무엇이 되었든 나는 타자의 필요를 전달받는 순간 마음을 작동하여 무엇을 내어 놓을 것인가 머리를 굴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와 맞아떨어졌을 때 묘한 쾌감을 얻는다.

 

하지만 거기까지인가. 베품이 종료된 후 보람과 뿌듯함의 근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왜 뿌듯한가.

 

나는 이모씨의 연락을 받고 만난다. 난 그의 필요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관계망을 동원하여 도움의 길을 열어줄 수 있었다. 그와 커피를 마시면서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면서 흥분됐다. 이 일이 잘 마무리 된 후에 주변인들은 나의 이런 행위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할 것이며. 그간 나의 외모 혹은 호불호가 강한 스타일 때문에 개인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날릴 수 있으되,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한 사람으로서 진정성을 알릴 수 있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나를 흥분하게 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베품의 이면을 부정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고, 꼭 이런 마음을 글로 표현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도 든다. 그러나 베품과 봉사, 동정 등 선한 가치 이면의 이기적인 인간의 면모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의 베품은 관계의 불평등을 초래하게 되고 난 이모씨를 을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난 뻔한 칭찬세례와 자신을 드높이는 방법이 몸에 벤 먹물이므로 페이스북이나 SNS를 통해 사진과 소식을 올릴 수 있으며 그것을 접한 타자들은 건조한 소식처럼 꾸며진 이야기를 보면 댓글을 줄줄이 달게 될 것이다.

 

선한 이면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칭찬은 얼마나 공허한가.

 

나도 살면서 타자의 도움을 절실히 요청할 때가 있다. 나는 그의 도움이 고맙지만, 그 도움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될 수는 있으나 자존감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남게 된다. 그가 떠벌리거나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거나 뿌듯해하거나 주변인들이 그를 떠받들때 나는 얼마나 위축되는가 말이다.

 

나의 베품은 내가 만들어낸 능력이 아니다. 살다보니 운이 좋아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건강이 허락해서 지금껏 살아갈 수 있었으며, 다행히 선한 가치의 세례를 받고 있는 일을 해온 덕에 다양한 인맥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간혹 도움과 관련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와 관련한 사람들을 소개해주는 매개역할을 하곤 한다. 그냥 난 그랬을 뿐이다.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악'의 근원은 나를 정서적으로 만족감을 주기도 하고 포장하여 주변을 속이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도움이나 베품은 상대방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관계는 계속 기울게 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선한 가치 이면에는 반드시 악의 근원이 있다.

나의 정서가 반드시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적어놓으니 편해졌다. 이런 작업의 반복이 나를 폭력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다. 나는 진정 폭력적인 '선한 자'가 되고 싶지 않다.

 

자비를 팔아온 마더 테레사에 속는 사람이 너무 많은 세상은 얼마나 굴욕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