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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공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1.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에 질문을 품다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객관식에 익숙치 않은 이들은 셋 모두를 갖겠다고 과욕을 부릴 테고, 대부분 사람들은 금도끼를 낙점하리라 생각합니다. 도끼는 나무를 베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  본래 목적대로라면 쇠도끼로 충분하겠지만, 금은 추후 교환가치를 가진 보물이기 때문이죠.


그동안 저는 ‘폭력’은 고를 수 없는 쇠도끼로서의 가치판단에 익숙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금도끼의 가능성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폭력 자체는 정당화할 수 없다는 말, 자주 써먹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강간현장을 목격하고도 강간범 ‘싸다구’ 한대 날리지 못하는 무기력함의 배후에는 폭력에 대한 부정적 가치가 작용합니다. 어차피 경찰서에 잡혀가면 그 놈이 그 놈이 되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그날 밤까지는 그랬던 사람입니다.

촛불시위가 한창 최고조에 이를 즈음, 명박산성이 등장했습니다. 그곳을 넘느냐 마느냐를 놓고,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돗자리 깔고 담론을 형성했던 중세시대의 철학자가 된 기분이기도 했고, 더 이상 무식(?)하게 싸우지 않고도 갈등을 관리할 성숙함이 움트는구나 하는 민주시민의 뿌듯함도 있었드랬습니다. 저들이 폭력적으로 다가와도 우리는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하다는 논리는 돌멩이가 낯선 대중들에게는 가슴을 울리는 평화의 메시지이자, 좌파빨갱이 운동권과 전선을 그을 수 있는 기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 중년 남성은 명박산성을 넘는 것은 폭력이요,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같은 놈이 된다는 논리를 펼쳤고, 저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며 얄팍한 논리로 발악발악 대든 다음 스티로폼을 쌓기 위해 자리를 털었습니다. 비폭력이라는 말과 간디선생이 오버랩되면서 잠깐 흔들렸지만, 분노를 방출시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간디가 재림하셨다면 눈물 없이 보지 못했을 그 소리 ‘비.폭.력’, ‘비.폭.력’


프란츠 파농은 “식민화된 인간은 자신의 골수에 깊이 감춰진 이 공격성을 자신의 동포에게 터뜨린다. 이럴 때 흑인들끼리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식민지시대의 인간이 억압자에 대한 폭력성을 억압자에게 직접적으로 발현하지 못할 경우 내면화한다는 뜻이겠지요. 개인적 내면화는 정신질환이 되고, 정치적인 내면화는 엉뚱하게도 피억압자끼리의 공격을 통해 파멸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명박산성을 넘는 행위의 ‘폭력’은 억압자에 대한 정당한 공격성의 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츠파농은 식민지민중의 폭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식민지 민중으로서는 폭력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폭력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 폭력의 행사는 그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은 폭력이라는 커다란 사슬의 고리들이 된다. 이 거대한 폭력의 유기체는 이주민이 처음에 행사한 폭력이 크면 클수록 덩치가 커진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시절, 식민지 민중으로서 살았던 경험이 있지요. 이후, 미국으로 이어지는 식민화는 프란츠 파농이 이야기하는 알제리 민중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을 통해, 폭력이라는 단어가 갖는 가치판단을 놓기로 했습니다.

어찌보면 언어라는 기호체계에 무중력 상태의 가치 없음을 요구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양가성을 인정하는 것이 폭력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2. 해방된 인간, 내안의 폭력성을 성찰한다.

프란츠 파농은 결론에서 “유럽을 버려라” 라고 말합니다.

이에 앞서 부족중심의 파편화가 아닌 의식화한 전체가 단결해서 움직이는 민족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민족의 해방을 위한 민족의식은 폭력을 통해 단결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의식이며, 그것은 독립이라는 결과물을 가져옵니다. ‘독립’은 식민화한 인간의 치유책이자 진정한 해방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생뚱맞게 유럽을 버리라니,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억압자로서의 위치에 대한 선망을 버리라는 의미 아닐까 싶습니다. 억압자에게서 해방하고픈 열망이 클수록, 그 억압자를 닮고 싶은 것 또한 인간의 욕망 아니겠습니까?

프란츠 파농은 해방이후를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유럽의 지배를 받았고, 그 유럽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으나, 결국 자유를 획득한 후, 폭력과 억압을 행사한 주체를 닮고자 하는 식민지 국가의 민중은 진정한 해방이 아닐테지요.


피억압자로서의 유경험자는 억압자를 부정하면서도 억압자를 닮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억압자에 대한 끊임없는 열등감의 발로일수도 있습니다.


‘유럽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곧 유럽에 대한 열등감을 버리라는 주문으로 들리네요.



3. 아직도 풀리지 않는 ‘폭력’ 에 대한 궁금증

억울한 일을 당하면 주먹을 쥐고 벽을 치고 싶습니다.

우울할 때, 누가 싸움 좀 걸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싸움 구경이 재밌습니다.

SM이 무척 궁금합니다.

모기를 비벼 죽일 때 전혀 미안하지 않습니다.

가끔 속으로만 소주병을 거꾸로 쥐고 깨트리는 상상을 합니다.

좀비의 내장이 터져나올 때 더럽지만 통쾌합니다.

폭력은 본성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