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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섹스/그남자

당신께


봄이니까, 뜬금없는 추억을 이해해주세요. 그러니까, 갑자기 오늘 밤 거리를 휘청이며 걷는데 당신생각이 나더군요.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과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시끌벅적한 천호동 로데오 거리를 걸을 때였어요. 겨울에도 바람은 불었는데, 유독 여름을 앞둔 따스한 바람은 마음을 그렇게 후비는지요. 당신이 소리쳐 나를 부르던 그 천호동 사거리 말입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요? 아마도 2001년인가 그때의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코뮨적 삶에 경도되었지요. 지역공동체활동에 온몸과 정신을 맡겨두고 살았드랬습니다. 적은 활동비 가운데 차비만 제하고 모두 적금에 붓는 살뜰한 주부이자, 아이의 엄마였어요.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서인지 몸은 불을대로 불었고, 조기축구회 티셔츠정도나 몸에 맞을까, 처녀적 옷은 걸쳐보지도 못한채, 아주 낙낙한 동네 아줌마로 살아갈 때였습니다. 어떻게든 활동을 잘해보고자 하루 24시간 통으로 지역운동을 고민하던 시절. 저는 회의며, 토론회며, 세미나며 아이를 업고 여기저기 출몰했습니다. 사람들은 따뜻하게 격려하기도 하고, 불쌍히 보기도 하고, 대개는 저의 그런 열정적인 모습에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노동자 마라톤 대회에서는 아이를 돌아가며 봐주던 분들도 있었지요.

오로지. 오로지. 지역을 변화하겠다고 맘먹고 살던 그때. 저에겐 중요하게 안고 있던 보따리를 놓친 기분이었습니다. 당신을 보고서 말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지역과 연대해서 활동해보겠다고 연락했고 저는 여느때와 같이 아이를 들쳐업고 그 먼곳을 방문했습니다. 참 잘생긴 당신이 걸어오며 전화한 장본인임을 밝히시더군요. 쩝. 아이는 왜 업고 왔나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때는 늦었고 우리는 부대찌게를 먹었습니다. 이야기에 집중할라치면 아이는 식탁을 엎어버리고, 우리는 물수건으로 닦아내느라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앞에서 난 왜이렇게 퍼진 아줌마인지, 참 부끄러웠습니다. 아이의 손놀림도 창피했습니다. 그때도 아마 조기축구회 티셔츠를 입었드랬죠? 

몇년동안, 저는 여자가 아닌 활동가로, 아이의 엄마로 살았어요. 그게 저의 정체성의 전부라고 생각했죠. 그 부대찌게 집에서 당신을 보기 전까지 말입니다. 뒤돌아서는데 괜시리 입이 헤 벌어지는게, 기분좋았습니다. 살짝 정신적 외도에 볼이 붉어졌어요. 참 잘생긴 총각이로구나 생각했었지요. 그리고 우리는 참, 열심히 연대했지요. 저같은 아나키가 그렇듯, 어디 활동의 당위성때문에만 움직였겠습니까? 일때문에 만나는 것도 즐거웠지만 끝난 후 뒤풀이는 매번 가슴설레는 경험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방문이후로 매일 전화를 하셨어요. 개인적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하루에 한가지씩 질문을 하셨지요. 시댁 부엌에서 일하다가 당신의 전화가 오면 얼마나 화들짝 놀랐던지. 화장실에서 똥누다가, 거실에서 졸다가, 빨래하다가, 수시로 당신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반가운 그목소리. 한번도 보고싶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사인을 보냈던거지요.

추석연휴였던것 같습니다. 우리는 돼지갈비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당신이 이 먼곳까지 방문하셨지요. 특별히 논의할 건 없었던것 같아요. 전, 봄날을 간다라는 영화를 보고싶다고 했고 언제한번 같이 보자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 혼자서 보고 말았지만 말이예요. 그날 당장 당신이 보자고 했지만, 저는 고작 2살박이 아이의 엄마인걸요. 아쉽지만, 점심식사를 마치고 헤어졌습니다.

당신은 뒤풀이때마다 술에 취하면 저를 뚫어져라 쳐다봤어요. 그리고 말했죠. "마돈나, 참 매력적입니다"라구요. 주변인들은 뚱뚱하고 못생긴 아줌마인 저를 쳐다보며 웃었지만 전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의 진심을. 눈을 맞추지 못해 고개를 푹 숙인채 소주잔을 기울였지요. 아이 때문에 일찍 집에 들어갈라 치면 천호동 사거리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습니다. "배신자, 집에 가지마~"라구요.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던 그대가 어찌나 귀엽던지. 정말 집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지역활동에 경도되었는지 알기에 눈꼽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게서 여성성을 주변인은 아무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런 제가 꽃이 될 수 있었던건 당신의 눈빛, 당신의 언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정했어요. 저렇게 멋진 사람이 나에게 왜 그럴까. 매일 스테이크 먹다가 된장찌게 먹고 싶었나? 하는 생각도 했고, 당신을 마구 쫓아다니던 여성의 눈치보기도 힘들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맘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타이밍인가 봐요. 그때 저는 정신적 외도만으로도 밤잠을 뒤척이던 약자였죠. 행여 누가 눈치라도 챌까. 조심조심했어요. 당신은 사랑하고 싶었던 때였고, 난 활동을 포기할 수 없었던 때였죠. 어디선가 자원봉사자들이 당신과 제가 사귀는줄 알고 물었드랬죠. 전 질겁을 해서 부정했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당신에게 맘을 표현했던건, 아마도 나이트를 갔을때인가요? 블르스 한판 땡기자고 손을 끌었을 때였을 거예요. 참, 촌스럽기도 하지. 나이트까지 가서는 그저 블르스 한곡에 가슴이 터져버릴것 같다니요. 애엄마가.

당신은 기억할 수 없겠지요. 어느날. 당신이 정말로 지우개로 나를 싹싹 지웠다고 생각했던때는 당신이 나를 "00엄마~"라고 부를때였어요. 오늘 전화에서도 그러시더군요. "애아빠는 뭐해?"라구요. 당신은 제 이름을 어느순간 부르지 않는군요. 당신은 그때, 늘 말했죠. 우리 부부처럼 살고 싶다고. 당신은 나의 남편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질투했어요. 지역에서 저렇게 활동하고 싶다고 말이지요. 학출 아니랠까봐. 그 예쁜 여성들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기준은 오로지 함께 활동할 사람을 찾았던것 같군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부부가 함께 활동의 현장에 나타나는게 그리도 좋아보였나요? 판타지일 뿐인걸....

문득, 천호동 사거리를 천천히 걸어오는데 당신 생각이났어요. 추억을 다르게 가슴에 담고 있겟지만,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니, 새삼스럽더군요. 난 이제야 컸는데, 당신은 다시 제도속으로 숨어버렸군요. 뭐, 관계란게 그런거죠뭐. 시간이 지났지만 말이예요. 식탁에 고개 숙이고 술잔만 기울이던 제가 아닌 걸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언젠가 만나면 말이예요. 당신은 점점 직위가 올라가고, 저는 백수가 되었어요. 꿈꾼대로 살아가니 행복하세요? 당신이 그토록 질투하던 저는 당신이 살았던 예전의 개인,자유주의자의 삶을 갈망하고 있어요. 우린 거꾸로 가는군요.

촛불집회때, 우연히 당신을 봤을때. 조금 나이들어보였어요. 그때처럼 잘생기지도 않더라고요. 참 가슴떨리던 당신에게 맥주를 건네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지요. 정말 아무렇지 않았지만, 조금 쓰렸어요. 그때, 우린 왜 아무말도 못했을까요? 추억할 것도 없고, 확인할수도 없는 그때. 아무렇지 않게 만나서 전 말할거예요.

참, 고맙다고.

당신을 마주하기 몇분전까지 내 삶에 이런 기억이 박힐거라고는 눈치채지못했었죠. 객관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잣대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사건. 예쁘게 보이려고도, 꾸미려고도,잘해보려고 계산하지도 않았으나, 정말 나를 좋아해줬던, 당신, 고맙습니다. 살다보니, 그런 낯선일은 자주있는 일이 아니더군요. 누구나 노력해야 얻어지는 관계뿐.
오늘따라, 그 관계들이 피곤하고 고되게 느껴졌는데, 당신의 전화한통화로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래요. 우리 만나요. 그간 얼마나 서로 성장하고 멋있어졌는지 확인해봐요. 당신나이 그때 34, 전 30 이젠 당신은 40을 넘겼겠군요. 얼마나 늙수그레해졌을까요?  술에취해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시간가는줄 모르겠어요. 오늘, 목소리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