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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공부

내게 있어 책읽기란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산책자 |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다가 문득 나에게 있어 책읽기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글자 이전에 언어라는 걸 습득하게 되면서 많은 이들은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이 어렴풋이 기억날 것이다. 더듬어 본다. 기억에 없다.
책읽기는 온전히 본인의 몫이었던 당시, 안타깝게도 난 글을 2학년이 되어서야 깨쳤다. 남들보다 2년가량 유예한 셈이다.

10대의 책읽기는 인어공주부터 시작한다.
학교 후문에는 대백과 사전 한질을 구입하면 망원경이나 지구본을 서비스로 준다며 영업자들이 눈에 띄곤했다.
당시, 나때문에 엄마가 개고생한다는 주위사람들의 세뇌 때문인지 소비욕구를 억압하는데 이력이 난 나로서는 언감생심 책을 질로 사들이는 건 현실성이 없어보였고, 성식이 오빠 집에서 대리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대백과 사전은 펼쳐보지도 못한채 망원경이나 지구본을 마냥 만져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 댁으로 보따리 싸서 보내질 무렵 엄마는 최초의 제안을 했다.
사고 싶은 걸 하나 사라. 이별의 징표로 목걸이 같은걸 주지는 못할망정.
여하튼 나는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동화책한권을 냉큼 골랐다. '인어공주' 그 물거품의 아련한 아픔, 외사랑의 덧없음을 그때 배웠던가?

여하튼, 시골로 간 나는 사랑방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선데이서울이나, 사촌동생이 읽다만 위인전, 삼촌들이 끄적거리며 읽었던 각종 소설들을 읽었다. 기억나는 건 루즈벨트 대통령 위인전이요, 나머지는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20대의 책읽기는 순전 폼잡기였다.
남자만이 여자를 꼬시기 위해 책읽기를 하는 건 아니다. 여자도 목적을 다른 데 두고 책읽기를 하기도 한다. 당시, 난 남자를 꼬시기 위했다기 보다, '난 너희들과 달라'라는 차별성을 목적에 두고 어떤 숭고한 의미부여를 자아에게 마구 심어주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10대 후반부터이다.

대학시절, 김현의 문학비평이나, 김윤식의 임화평전, 보들레르의 시, 아타키즘 관련한 책, 사상서 월간 현대문학 등등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 이렇다할 선배도, 선생도, 책을 함께 토론할 친구도 없이 그저, 서점 사회과학서적이나, 문학코너를 돌며 멋있어 보이는 책들을 골라 읽었던 듯 한다. 물론 학교도서관 죽순이기도 했다. 열람표에 가득하게 적힌 도서목록은 아직도 갖고 있는데 내가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은 정말 하얗다.
다만, 목적은 이룬 셈이다. 당시를 회고하던 남자친구는 "우리학교에서 네가 제일 멋있었다" 한마디로 갈음해주니까 말이다. 이건 자랑.

하지만, 부끄러운 과거이기도 한다. 공부라는 걸 자좀감의 재료가 아닌,  쾌락의 도구였다면 난 어쩜 의도하지 않았어도 알짜배기 멋있는 사람이 되었으리라.'목적이 이끄는 삶'은 사람을 한없이 초라하고 텅빈존재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알맹이 없는 벼껍데기같이 휑하다. 그리고 후회한다.

로쟈가 거론한 책들과 영화들, 많은 텍스트들이 그 세월에 나를 거쳐갔건만, 어쩜 주인공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가. 웃긴건, 그가 느꼈던 저 감흥을 나는 느끼지 못했을 뿐더러, 마치 공무원시험서를 들여다보듯 땀을 삐질삐질흘리며 게걸스레 우겨넣었을 뿐이다.

30대의 책읽기는 삶이다.
커리어에 대한 로망이 있던 시절, 정확히 말하면 20대 후반이건가. 난 자기개발서를 탐독했던 것같다. 정말이지, 매일같이 주먹을 꽉쥐고 살지 않았던가. 비동시성엔 고개를 돌리고, 동시성을 불러일으키는 의식에 주목하고 마치 그것이 이뤄지고 있는냥, 전도가사 된듯 열정과 긍정에너지를 마구 퍼올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짓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욕망과 삶과 직결된 무엇이었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나다'를 만났다. 한참을 솔로로 지내던 이들이 애인을 만나 첫번째 묻고 싶었던 말이 "왜 이제 나타났냐?" 던가. 왜 이제야 저를 찾아오셨는지 가슴팍을 고사리같은(?) 두손으로 콩닥콩닥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나에겐 신선한 자극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렌즈를 만들어 주는 인문다운 인문으로의 진입이라고나 할까.
그 이후 고구마줄거리처럼 재미난 책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 신선하고 파릇파릇한 애인들이여.
난, 침대에 방금 배송된 젊은 애인들을 펼쳐놓고 한참을 흐믓하게 바라보았다. 표지만 봐도 가슴이 설렌다.
앳지나는 사각형의 친구들... 잠을 자지 않고도 피곤하지 않을 수 있다면 밤새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어쩌랴. 조각모음의 시간은 순전히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적 본능인것을.

어느새 책을 의인화하는 단계에 이른 셈이다. 즐겁지만 때론 망치로 견고하게 얼어붙은 관습의 굴레를 깨는 아픔도 겪어야 하고, 난독의 괴로움속에 살짝쿵 삐지기도 하고, 너무 다른 그대를 보며 왜이렇게 다른지 한숨을 쉬기도 하고 아예 재미없음 버리기도 한다.

어제, 내 침실을 뒹굴던 책을 소개한다.
무례한 복음 때문에 지른 이택광의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대상'
세미나 때 읽어야 할 프란츠파농의 '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이택광이 알라딘과의 인터뷰에서 추천한 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피터싱어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