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읽기

김수환 추기경과 용산참사 다 같은 죽음이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
큰 별이 졌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사랑하라는 한마디를 남겼다는군요. 오랜만에 TV를 켜니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장의 풍경이 국장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화면을 가득채우고 있습니다. 1만여명의 추모객들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습니다. 평화방송의 한 장면에서 10년전 그와 만났던 그날을 발견했습니다.
99년 1월, 장지동 화훼마을 화재사건으로 117가구가 전소되어 비닐하우스 주민들이 천막에서 추운겨울을 날 때였습니다. 정부에서는 대책마련은 커녕 천막농성과 집회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했을때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습니다. 그의 방문은 졸지에 집을 잃어버린 비닐하우스 주민의 주거권을 보장하라는 암묵적인 '회초리'였습니다. 종교인 가운데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로서 어려운 행보였을 것입니다. 그는 시끄럽게 오지 않았지만 그의 방문은 지자체가 크게 당황하고도 남는 사건이었습니다.

명동성당의 장례행렬을 보며 문득 용산참사가 떠오르더군요. 날로 줄어드는 용산참사 집회인원은 지난 촛불집회처럼 전경차 한대를 뚫지 못해 오도가도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집회하다가 마지막에는 명동성당에서 마무리를 하곤 했습니다. 용산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유가족들은 명동성당에 천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명동성당은 '신변보호'요청을 했더군요. 유가족들이 무슨 위협세력이길래 신변보호 요청을 해서 카톨릭회관 직원조차 출입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메카인데 말입니다. 민주화는 물건너간 이야기라 하더라도 약자가 유일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심정적 치외법권지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을 위해 MB에게 엄중한 '회초리'를 들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니,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명동성당은 품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죽음도 다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글픔을 거두지 못하겠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연사를 했습니다. 용산철거민은 타살당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시신은 성스럽게 용인의 묘지까지 모셔졌고 많은 이들의 애도와 존경속에서 묻혔습니다. 용산철거민은 가족의 동의도 없이 함부로 부검되고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김 추기경의 훌륭한 업적과 존경심을 누구와 비교하겠습니까만은 사람은 다 소중합니다. 탄생과 죽음의 순간은 더욱 그렇지요. 누구의 죽음이든 현실과의 별리는 아픕니다. 하지만 큰별의 죽음앞에 용산철거민의 죽음이 이다지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요? 장소가 명동성당이어서 그런가요? 

"서로 사랑하라"
추모객들은 인터뷰에서 "그분 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분처럼. 서로 사랑하고 싶다. 나는 문득 제발 그렇게 살아가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처럼 사랑을 실천하라고요. 그분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민주화운동에 힘을 보탰고, 개발로 밀려난 철거민의 뒷심이 되어 주신 분입니다. 그분의 지지로 인해 철거민은 힘내서 싸울 수 있었고 천주교는 한국사회에서 다른 어떤 종교보다 진보적이라는 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 1만의 추모객이 용산집회에 오기를 바랍니다. 만약 김 추기경이 건강하셨다면 이곳을 지지하셨을거라는 기대를 합니다. 그가 남긴 그 말을 실천하고 싶다면, 그저 자비의 손길로 나보다 못사는 이들에게 돈을 나누는 것을 넘어 억울한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다같은 죽음입니다. 서로 사랑해야지만이 다같은 죽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심한 밤, 갑자기 답답해져서 잠을 설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