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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섹스/그남자

고백


철든사람 특유의 자기관리는 더 슬프다. 난 안다.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이건 얕은 쿨함과는 거리가 먼, 그러니까 인생의 경륜이 가져다 준  관계의 지혜에 더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그에게 할부끊 게 할 수 없어서 오늘은 나의 감정을 말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단 둘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회의를 마치고 가는 길이어서 본의 아니게 증인도 함께 자리를 했다.

동대문에 가면 북어포를 파는 슈퍼가 있다. 외형은 슈퍼이지만 실은 선술집이다. 여름에는 문닫힌 등산용품가게 앞에 파라솔을 펴고 밤샘 장사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추운 탓인지 몇평안되는 슈퍼안에 손님들이 옹기종이 모여서 술을 마신다.
마침 북한과 남한의 축구경기가 시작됐다. 한 테이블의 청년들만 관심을 가질 뿐 나머지 손님들은 그닥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만약 한일전이었다면 다들 난리가 났을텐데 말이다. 이미 북한에 대한 벽은 허물어진 지 오래된 듯하다.  아직도 민족주의는 각종 스포츠 경기장에서 살아날뛰는게 불편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건그거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선배가 먼저 지나가는듯 물었다.
"야, 너 저번에 소주마시자고 하니까 왜 대답이 없었어? 뭐 부담되고 그런거야?"
"형, 먼저 말을 꺼내줘서 고마워요. 그렇잖아도 말하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뭔데?"
"저 실은 부담스러워요. 형이 저를 좋아하는거 맞죠? 형의 그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직접 말씀하지 않으셔서 혹시 제가 오버하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망설였어요"
"그래, 맞아. 나 너 좋아한다. 하지만 저번에 만나자고 한건 네가 나보고 사랑하는 이에게 지르지 못한다고 한 말의 뜻을 알고 싶어서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질렀다"
"저는 형과 연애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솔직히 남 다른 감정 때문에 부담스러웠던 것 사실이예요"
"알았다. 내가 정리할께. 미안하다"
"미안하다뇨. 그냥 제 감정을 전하고 싶었어요. 할부끊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실고 해석하게 되면 서로 불편하고 힘들잖아요."

담배가 탁자에서 떨어졌다. 난 얼른 고개를 숙여 담배를 주웠다. 고개를 드는 순간, 선반에 머리를 박았다. 이 중요한 순간에 머리통은 박살나듯 아팠다. 그치만 어색하게 웃을수도, 아프다고 찡그릴 수도 없는 그순간. 몇초가 그냥 흘렀다.

난 정말 그가 길게 상처받을까봐 배려해서 단호하게 감정을 전했던 것일까? 그런면은 철든 이가 갖는 의식적인 생각이고, 어쩌면 난 내 속 편하자고 말할 기회를 빨리 갖고 싶었을 뿐이고, 기회가 오자마자 구구절절 댓구했을 것이다.

그런 내가 참 낯설다. 하지만 난, 멋있게 보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인지 그 사람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댔다.

"난 형이 몇년전부터 저를 다르게 생각한다는걸 알았어요.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지 않으니까 불편했던 거죠. 지금 이시간이후로 달라질건 없겠지요. 하지만 편하게 형을 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상처받지 말라는 말은 위선이라고 생각해요. 상처는 받을텐데 그건 형의 몫이죠. 그냥 잘 정리될거라 생각해요"
"그래도 사랑한다면 어쩔거냐?"
"그건 형의 감정이죠.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형편은 못되요. 지금 이순간 저는 정리가 됐고, 형은 어쩌면 고민의 시작일지도 모르겠군요. 형은 저 마돈나 자체를 좋아했다기 보다 지금 현재 형의 타이밍이 그런순간인거겠죠. 이 순간이 지나면 언제그랬냐는듯 괜찮아질거라 생각해요"
"그래, 실은 몇개월간 우울증이 있었다. 네 말에 민감한것도 그것때문일지 몰라. 그래, 여하튼 이런 이야기 할 수 있어서 기분좋다."

난 들을 수 있다. 선배가슴에서 썰물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역지사지가 되니 맘이 쓰린다. 편한것과 그 사람을 이해하는것은 좀 다른 이야기다. 나는 가진자 입장에서 못가진자에게 배려하듯 말하는 나의 차분함이 역겨워서 화장실로 향했다. 좁은 계단을 가까스로 올라가니 냄새나는 화장실이 보인다. 작은 화장실 문을 닫고 허리띠를 풀렀다. 방금전의 대화를 상기하면서. 바지를 내리려다 보니 다른 사람의 긴 다리가 눈에 띤다. 아뿔싸. 여기는 남자화장실. 청년이 한창 일을 보고 있는 중이였다.

난 주위를 환기시키고자 옆의 증인에게 말했다.
"난 요즘 내가 무식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 당췌 아는게 있어야 말이지"
"맞아, 넌 무식한게 매력이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그럼 백치미가 있다는거야?"
"얌마, 백치미는 이쁜걸 전제로 하지. 넌 그것도 아니잖아"
"내가 그렇게 무식한가?"
"백치미와 무식한거는 달라. 그러니까 마돈나 너는 머리에 꽉차있어. 다른사람보다 많은 걸 알고 있기도 하지. 하지만 너 자신은 네가 그렇게 많이 알고있다는 것을 모르니까 무식한거야. 아님 일부러 모르는척 하는건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넌 네 자신을 몰라. 얼마나 꽉차있는지를. 그러니까 무식한거고 그게 매력이라는거야"

참, 어뚱한 매력이다. 백치미라면 금잔디를 언뜻 상상할텐데. 하기사 내가 매사에 얼렁뚱땅하고 우왕좌왕하고 엉성한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엉성함을 사랑해주지 않는다. 난 금잔디가 아니니까.
증인 덕분에 주위가 환기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이런 사실을 블로그에 쓰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내블로그야 소수정예니까. 그가 누군지 모를거고 정말 내속편하자고 지껄여보는거다. 참 이기적이다. 나란 인간. 덧붙이자면 글을 즐겨 쓰는 사람과 관계맺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이런식으로 공개되는 사적침해를 감수해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너무 치명적이라면 공여사의 전남편처럼 개인사공개금지가처분신청을 해야할지도...

난 희망고문을 하지 않는다. 몇번의 사랑의 상처가 내게 준 선물이다. 그렇다고 내가 희망고문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당하는 것과 내가 하는 행위는 다르니까. 선배를 위로하고 싶었고, 선배가 받아들이는것 만큼 사람을 싫어한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은 아꼈다. 불편함을 고백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으나 강조하지 않았다.
내 감정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 또한 어떤 매력있는 남자에게 이런 대사를 들을 지 모를일이다. 그리고 푹꺼진 가슴을 추스리며 뒤돌아설지 모를일이다. 그러나 철이 든다는건 밀물썰물이 오가듯 자연스럽게 감정을 내버려둘 수 있다는 것. 상대방의 피드백에 따라 자신의 감정이 돌변하지 않는것. 관계에 있어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추억할 수 있는것. 그거 아닐까. 난 철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사랑에 있어서는 간혹 철 들 필요가 있다. 물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건 철저하게 이타적 의미다.

오늘은 참 이기적인 시간을 보냈다. 사랑받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사랑의 권력이 규정되고 받는 자는 이기적이어도 그것조차 매력적이 된다. 사랑하는 자는 받는자의 처분에 천당과지옥을 오가고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매력이 반감되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자가 무슨죄인가? 사랑을 더 많이 하는 것 빼고 꿇릴게 뭐가 있냐 말이다.
아! 정말 어려운건 이런 사랑의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