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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섹스/그여자

안토니아스라인을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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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 권하는 사회에서
딸로 산다는 것


Prologue


과거를 팔아 먹고사는 방법은? 불쌍하게 보여서 모부성본능을 유발시켜 이성의 환심을 산다. 과거의 화려한 경험을 글로 쓴다. 성공하면 자기계발에 대한 명 강의로 이름 석 자 날린다. 목사가 된다.

이번 기회에 난 아무래도 과거를 팔아 글을 써야겠다. 솔직히 이런 종류의 글을 쓸 때 치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상상력의 부재로 고작 과거를 팔아야 하다니. 되도록 담담하게, 되도록 타자화해서 표현하려고 하지만, 울컥하고, 분노하면서 엉망진창이 된다. 난, 지적여보이는 여성을 좋아한다. 말투와 옷차림, 직업, 성격도 지적인 여성을 보면 몸둘바를 모른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변태의 과정 없이 난 선망하는 그런 모습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솔직히 이젠 대리만족 수준이지 꼭 그렇게 닮고 싶지는 않다. 내 삶의 공간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테라코타처럼 빨간 황토자체로 덧발라진 내인생이 그럭저럭 맘에 든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나의 분노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내게 안토니아스 라인이랄 것이 있을까 했는데 생물학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엄마가 날 낳았고 난 아들도 아닌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엄마처럼 되기 싫어서 정말 엄마와 다른 유전자로 바꿔버린 나와, 자기엄마를 역할모델로 삼고 있는 나의 딸 세여자는 현재 같이 살고 있다. 엄마와 나의 갈등을 달래며 중간자적 역할을 하고 있는 2학년짜리 꼬마 때문에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딸을 끊임없이 질투하는 나와, 일 때문에 바쁜 일정중에 놓치는 아이의 목욕과, 손톱깎기 등 양육과 관련하여 질기게 조언을 퍼붓는 엄마와의 갈등을 이제는 제대로 관리하고 싶다. 안토니아스 라인을 기록하는 과정은 나의 분노를 제대로 바라보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내 개인을 넘어 다소 우스꽝 스러운 악의축을 제거하는 폭탄과도 같음을 알았다.

The present: 나는 내딸을 질투한다


“생활은 궁핍한 것이 사모님 못지 않게 사는구나”

기타를 튕기는 다 큰 딸을 두고 하는 엄마의 말이다.

한번 힐끗 쳐다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코드를 더듬더듬 짚어본다.

얼마전 구민회관에서 실시하는 포크기타반에 등록하여 동네아줌마들과 함께 기타를 배우고 있다. 두어시간 튕기다가, 서둘러 가방을 챙겨 영어학원으로 향한다.

“공부하는건 좋은데 너무 빨빨거리고 돌아댕기는거 아니냐?”

또 한번 힐끗 엄마를 쳐다보고 현관을 나선다.

여기까지, 경제력 있는 남편을 둔 전업주부의 문화적 삶을 사는 듯한 나의 모습이다.


시민단체 상근자로 활동하면서, 비슷한 일을 하는 남편을 둔 내가, 어처구니 없게도 문화적 삶을 사느라 이렇게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하고싶은 일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던 나는 보살핌의 사각지대에서 정규학교 이외에 학원문턱조차 가보지 못한 유년시절에 대해 앙갚음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공부하라는 잔소리 한번 들어보는 게 내 소원이었다면, 이런 방식의 앙갚음이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 앙갚음은 내 딸 황토현으로부터 비롯됐다.

맞벌이 부부를 부모로 둔 딸은 죽어도 가기 싫은 어린이집을 다녔고 적응할 즈음, 태권도를 보내달라고 했다. 태권도학원을 등록하고 1년을 다닌 끝에 품증을 딴다. 물론 국기원도 다녀왔다. 무데기로 통과의례를 치루는 국기원의 분위기가 어이없었지만, 도복을 입고 얍얍 소리내는 자식의 모습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그 뿌듯함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뿐이랴. 초등학교 방과후의 다양한 프로그램 중 수학과 가야금을 듣고 싶다고 해서 등록했다. 거기다, 아이를 온전히 봐줄 수 없는 엄마와 시댁식구들에게 피해주고 싶지 않아 방과후학교를 다니고 있다. 숨차게 그 일정을 소화하면서 딸은 불만을 토론한다.

“엄마는 직장 한군데만 가면 되지만, 난 여러곳을 다녀야해. 내가 얼마나 바쁘겠어. 그러니까 난, 학교를 끊어야겠어. 너무 바빠.”

8살짜리 꼬마는 여러곳의 배움터 중에서 학교가 제일 재미없다고 느꼈는지, 학교를 끊겠단다. 한국사회의 초등학생은 거의 이런 패턴의 사교육을 경험하리라 생각한다.

뺑뺑이 돌리는게 실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보다는 부모의 퇴근시간을 맞추려는 의도도 있지만 이런저런 것을 고려해도, 역시 난 딸이 부럽다. 나같은 엄마를 둬서 말이다.

조기교육이나 강제로 학습시키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적극 밀어준다.

가야금을 배우고자 하는 동기는 아무래도 기타를 배우기전 몇 개월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가야금을 깔짝대던 내모습을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다양한 관심과 욕구는 딸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난 깨끗이 입히고, 먹을거리에 신경쓰는 양육에 약하다. 손톱이 너무 자라 부러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주위사람, 즉 시어머니, 동서, 혹은 선생님에 의해 잘려나갈 정도니까 말이다. 다만, 내 방식의 보살핌은 딸아이의 호기심을 충족해주는 것이다.

“넌 참 좋겠다. 엄마같은 엄마를 둬서 말이야” 내가 딸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딸아이는 수긍하는 편이다. (역시 주입식 교육은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정엄마는 내딸에 대한 나의 양육방식에 불만이 많다. 잘 먹이고 잘입히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다. 그러면 울컥울컥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러는 엄마는 어땠는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당뇨합병증으로 눈수술을 해서 앞도 잘 못보시고 위암수술까지 해서 종잇장처럼 흐믈거리는 엄마에게 마지막 펀치까지 날리고 싶지 않아 가까스로 참는다.


엄마는 현재 우리가족의 구성원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구성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라도 건강이 호전되면 집으로 내려간단다. 집? 엄마는 집이 없다. 조상의 위폐를 모시는 사당의 관리실에서 혼자 살아왔기 때문이다. 수술하면서 도저히 혼자둘 수 없었기에 우리집으로 모셔왔다. 가진것이라곤, 옷가지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통장 덜렁 한 개가 전부다. 속도 모르는 이들은 “딸 하나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몸이 이지경이 됐냐”라고 끌탕을 한다. 집밖에서 나름 시끄럽게 살고 있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엄마에게 효도하라”며 신신당부한다. 심지어 지난해 속이 복잡해 찾아갔던 무당할머니조차 “엄마에게 효도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엄하게 당부했다. 참, 엄마는 복도 많지, 나 같은 딸을 둬서 말이다.

결국, 난, 나의 엄마와, 내 딸이 나같은 사람을 만나서 복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어깨에 주렁주렁 달린, 엄마와, 딸의 무게가 나를 자꾸 밖으로 돌게 만든다.

밖으로 돈다는 게 별거 있나. 돈독한 친구들이나, 사회적 관계로부터 보살핌을 받고자 그런 관계들에게 정성을 쏟는 행위 말이다. 가족에게 집중할 시간의 많은 부분, 이웃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엄마는 가끔 짜증을 낸다. 힘들게 일하고 들어온 내게, “난, 봄만 되면 내려갈꺼야”라든가, “도대체 이런식모가 없다 없어, 돈으로 따지면 얼마냐?”라는둥,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때가 있다. 처음엔 어쩜 엄마가 왜 저럴까 이해가 되지 않아 화를 내곤 했는데, 지금은 “음.또 드시고 싶은게 있는게로군”하며 좋아하시는 음식을 사다드리면 이내 풀린곤 한다.

요즘, 입맛이 다를지라도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이 고맙기 그지없다. 이제야 보살핌을 받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갑자기 기온이 영하 10도로 떨어지자 엄마는 자신의 옷을 내어준다. 10대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브랜드의 오리털 점퍼다. 언감생심 내돈주고 사입을 수 없는 옷이다. 내원참, 앞도 잘 안보이는 양반이 외출을 하면 어디를 한다고 좋은 옷에 대한 욕심은 버리지 못하고 이런옷을 구입하시다니. 어이가 없지만 여하튼 따뜻해서 좋다.

동거를 시작한 20대 때에는 엄마의 그 비싼 브랜드 옷을 입어 헤치우느라, 남은 음식 먹어치우듯이 싫증난 옷을 물려 입었다. 대개는 딸의 옷을 엄마가 빌려입는다는데 우리는 다르다. 엄마의 옷을 물려입는다. 그래서 신발은 크게, 옷은 헐렁하게 입고다녔다. 아무리 좋은 옷이라지만, 나도 나의스타일이 있는법, 엄마의 옷은 입기 싫었지만, 우리 가정형편 때문에 옷장속에 내옷을 또 채울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은 몇 번의 대수술을 하신 엄마가 나보다 무려 10킬로그램이나 적기 때문에 헐렁하게 입을 일은 없다. 단지, 이젠 더 이상 엄마옷을 물려입지 않을 정도로 내옷장에 내옷이 차있기 때문이다.


The past: 엄마는 나를 남편으로 생각한다


나는 딸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함께 여행을 갈 작정이다. 네팔이나, 베트남에서 한 일년 살면서 잊지못할 소통을 하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4학년일까. 4학년 정도면 당시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적어도 내 경우에 그렇다.

난 나의 초등학교 4학년 봄을 잊지 못한다.


엄마는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나는 그 보따리의 매듭이 엄마의 보살핌이 매듭지어지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오래가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가족구성원이 된 지 1년도 채 안되는 아저씨는 화가 나있었고, 멋도 모르는 아저씨의 자식, 그러니까 나의 배다른 남자형제들 2명은 짓고까부느라 정신없던 오후였다.

외할머니가 갑자기 들이닥치기 전까지 가족구성원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나 조차도.

할머니는 다급히 문을 들어서자 마자 보따리를 빼앗아 던져버렸다. 그리고 난 알게 되었다.

나의 친아버지에게로 나를 보내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었다는 것을.

얼굴도 가물가물한 나의 친아버지에게 왜 갑자기 보내져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무기력하게 보따리를 다시 주섬주섬 쌌고, 할머니는 포효하듯 소리를 지르다 실신까지 할 지경이었다.


“이년아, 그렇게 서방이 좋냐? 자식을 버리게? 어디를 갔다 준다고, 저 정신머리 빠진년 같으니라고, 저놈이야 지자식이 아니니 같아주라고 할테지만 네년은 속으로 자식을 낳은년 아니냐. 같다주긴 어디다 같다줘. 내가 기를거다 이년아. 다시 찾아올 생각 말아라”

난 우왁스런 할머니 손에 이끌려 그길로 용인으로 내려갔다. 어찌어찌해서 전학서류를 떼고 다급하게 내려갔는데, 이런, 내 이름이 이상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은가?

학교행정이 그렇게 엉망인지 지금도 이해가진 않는다. 내 원래 이름은 최미선이고 학교에서도 최미선으로 생활했다. 그런데 전학서류를 떼어보니 호적에는 최영선으로 기재되어 있는게 아닌가.

지금도 집에서는 미선이고 사회에서는 최영선인 이유이다. 얼핏 본 호적등본에는 이름모를 사람들이 줄줄이 적혀있었다.

난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모친이 있었고, 형제자매도 3명이나 있었다. 뭐야 난 넷째란 말인가? 커서야 안 사실인데, 엄마는 미혼모였다. 요즘에야 모자가정으로 학비도 지원받고 살길이 있었을텐데, 엄마는 내가 5살이 되던 해부터 혼자서 다방마담이며, 찻집, 옷가게 등을 운영하다 결국 아저씨를 만나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된 셈이다. 엄마는 나를 보살피기 보다 남편의 보살핌이 필요한 여자였을게다.

부자인 나의 친아버지는 미혼모인 엄마와 알콩달콩 딴살림을 꾸리며 재미나게 내 유년시절, 그러니까 5세까지 그렇게 지냈다고 한다. 아버지는 엄마의 친정에 많은 돈을 발랐고(엄마 표현이 그렇다), 각종 보석이며 부족하지 않게 돈을 엄마에게 줬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천호동에 집한채는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고 한다. 정말 한치앞도 설계하지 않는 젊은 부부는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자 헤어졌고, 우리모녀는 한순간 사회의 온정이 필요한 한부모 가정이 된 셈이다. 엄마는 죽은 자식 불알만지듯, 집한채를 사뒀어야 한다고 끌탕한다.

60이 넘어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난 그리고 5학년때 가출했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첫 가출이 초등학교 고학년때임을 감안하면 나는 적당할 때에 가출한 셈이다. 고작 이사한 엄마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간게 전부이지만 말이다.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서 난 가출했다. 할머니가 찬장에 모아둔 동전을 한웅큼 훔쳐다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내내 고질병인 멀미조차 하지 않았던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천호동에 내려 세탁소문앞에서 문을 열까말까 한참 고민했다. 세탁소 안의 수증기 사이로 저녁상을 내오는 엄마가 보인다. 그리고 아저씨와 자식들도 보인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법한 평범한 가족의 일상이 나에게 너무 멀게 느껴졌다. 모락모락 김을 뿜는 하얀 쌀밥 때문인지, 난 정신없이 문을 열었다. 그 가족들은 일순간 정지된 상태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는 말한다. “밥먹고가”

내가 그곳을 방문한 목적이 그저 쌀밥을 먹으로 온 사람인냥, 아무말 없이 쌀밥에 콩나물을 얹어 먹고는 다시 용인행 버스를 탔다. 아무말도 못하고.

할머니댁에 거의 도착할 무렵,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애통터지는 울음소리는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니였을까. 난 그리고 결심한다. 맘잡고 열심히 살겠다고. 나의 엄마는 이제 할머니라고 말이다.


손이 부르트도록 할머니를 도왔다. 학교갔다 오면 책가방을 던지고 가마솥에 불을 떼서 소여물을 쑤고, 할아버지 면도며, 빨래를 거들었다. 군에 갔다온 삼촌은 소값 폭등에, 토끼의 떼죽음에 하는일마다 무너지는 경험을 하며 내내 폭력적으로 변해갔지만, 난 이를 악물었다. 할머니의 아들인 삼촌이므로 참아냈다. 혹한의 추위에서도 만둣국을 끓여내라 하면 화투치는 삼촌에게 만둣국을 끓여냈고, 전등갓에 붙은 먼지며, 바닥의 담뱃진을 치약으로 깨끗이 닦아내라 하면 닦아냈다. 문득문득 폭력적인 언행도 참아냈다.

매년 명절때면 엄마를 뺀 모든 가족들이 모여 나의 미래와 엄마에 대한 흉이 오가더라도 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머리를 털었다. 그때는 어찌나 망각이 빠르신지, 그러고도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지금도 그 삼촌 앞에서 주눅들지만 말이다.


고등학교는 읍내로 나가야 해서 막내 이모댁에서 생활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혼부부인 이모부부가 고3인 나를 작은 아파트의 방을 내준다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할머니의 입김이 들어간 듯 싶다. 공부를 잘해서 수원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난 좌절됐다. 친구들은 수원에 있는 학교에 가고 싶어도 성적이 안되서 못가는데 나는 선생님이 당연히 수원으로 진학할거라고 기대했었는데 어이없게도 다른 학교에 진학신청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난 방황했다. 늦은 사춘기를 겪은 것이다.

대학교에 가기 위해 인문계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모들은 반대했지만, 할머니는 지지해주셨다. 속내는 야간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으셨지만, 나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할머니는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엄마는 가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저씨에게 흠씬 두들겨맞은 다음날이면 말이다. 부부싸움을 격하게 하고 와서는 내게 맛난것도 사주고 옷도 사준다. 엄마의 품이 얼마나 좋던지, 난 마치 짝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성은을 입은냥 고맙고 고마워서 학교수업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엄마가 온 날이면 난 아무데도 가지 않고 엄마옆에 붙어서 최대한 말을 잘들었다. 잘하면 엄마가 영원히 나랑 살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엄마는 짜증이 늘고 그런날이면 어김없이 엄마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만다. 다시 그 가족구성원에게 돌아간 것이다. 나와 관련한 공식행사는 6학년 졸업식에 한번 나타났다. 중고등학교 입학, 졸업식은 항상 혼자 치러야했다. 난, 입학,졸업사진이 없다. 아무도 사진찍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입학식에는 엄마가 오겠지 싶었지만, 내 전화소리에 엄마는 “넌, 내사정도 모르니? 아저씨가 싫어하는거 뻔히 알면서 그려냐?”라며짜증내며 끊어버렸다. 망각의 힘은 얼마나 무서운지 이미 가출했을때 포기해놓고선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다.


난 대학생이 되었다. 할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부자가 된 삼촌은 입학금을 마련해주었다.

난, 더 이상 다른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교 캠퍼스커플이었던 남자친구가 나를 만나고 싶어 내가 일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난 데이트할 시간조차 없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대학졸업한후 돈을 많이 벌 생각이었다. 삼류지방대학교 기숙사를 가면서 난 드디어 독립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모두 자기집으로 돌아간 주말이나, 방학이면 갈곳이 없어 거처할 곳을 정신없이 알아봐야했다.

매학기때마다 난 학비 때문에 종종거려야 했다. 휴학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왜 그때는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원망스러울 뿐이다. 엄마는 2년 정도 학비 4번을 대주었다. 그때는 청량리에서 건강원을 하고 있었다. 곱던 엄마는 어느덧 고생에 찌든 당뇨병 환자가 되어 있었다. 학비를 줄때마다 근처 분식집에서 몰래 접선하듯 만나야했다. 엄마는 정신없이 돈을 건네주고 돈까스를 시켜준뒤 사라진다. 무능력한 내 자신이 싫어서 이대로 삶을 끝장내고 싶었지만, 난, 연애중이었고, 남자친구의 살뜰한 보살핌 때문에 삶을 놓을 수 없었다.

난, 결심한다. 그동안 양육에 대한 책임을지지 않은 아버지에게 한학기의 학비를 대달라고 요청하기로 말이다. 어렵게 전화기를 들었는데 아버지는 같이 사는 여자분에게 들킬까 “어렵다”고 소곤거린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참, 팔자 박복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나, 아빠나 어쩜 저리도 자식생각은 안하는가 하고 말이다.


난 대학교를 졸업했다. 나의 성장을 지켜봐온 할머니를 비롯해 금전적, 심정적 지지를 해주신 친척분들의 축하를 받으며 말이다. 물론, 엄마는 이번에도 불참이다.

난, 졸업도 하기전에 취업이 되었다. 작은 출판사에 출근하면서 꼭 자립하리라고 결심했다.

이번에는 큰이모님댁 지하에서 살기 시작했다. 화장실이 없어 윗층에서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지만,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긴 그날의 기쁨을 잊지 못한다. 대학교시절 내내 모아둔 3백만원을 전세금 비슷하게 내어놓고 살았다.


“나 너랑 살거야”

쇼핑백 하나 달랑 들고온 엄마의 한마디다.  드디어 경제적 자립을 시작한 지 서너달이 된 시점에서 우리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출판사에서 나는 한달에 54만원의 급여를 받았다. 차비와 생활비를 빼고 꼬박 30만원을 저축하며 모처럼 엄마와 함께 일상을 보냈다. 아저씨에 대한 폭력으로 병만 얻는 엄마는, 건강원에서 궂은일을 해온 댓가로, 10년동안 두아이를 기른 어떤 댓가도 없이, 속옷 서너가지만 챙긴채 나에게 온 것이다. 아니지, 가지고 온게 있었지. 달러빚으로 눈덩어리처럼 불어난 4학기 학비와 함께.

불안한 미래를 위해 난 열심히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러나 IMF 전에 출판사에서 구조조정당했고, 정신없이 뛰어다닌 덕에 작은 지역신문사 취재기자로 취직할 수 있었다. 물론 박봉. 그러나 내여분의 일할 수 있는 책상 하나라도 절실했던 당시에 난 그나마 감지덕지하면 살았다. 빚도 갚아가면서 말이다.


사회적 관계로 보살핌을 대신하는 나의 특성상, 일하면서 늦는 일이 잦았다. 늘 나에 대한 걱정으로 밤점 설치시는 할머니께서는 우리집에 오시는 날이면 잠을 못이루신다. 늦도록 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반면, 엄마는 코골며 주무신다. 이런 것이 기른정이가 싶기도 하다. 월급을 엄마에게 통째로 맡기지 않는다며 버럭 화를 내는 엄마와 달리, 용돈도 마다하는 할머니는 정말 비교되도 그렇게 비교될 수 없다. 그래도 난 분노가 뭔질 모르고 살았다.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꿈꾸던 동거인가. 엄마, 엄마 말이다. 내게도 엄마가 있다.


“다 엄마 덕분인줄 알아라”

친척들이 십시일반하여 마련해준 혼수품을 두고 당당하게 내게 던진 엄마의 말한마디다.

난, 엄마와 할머니를 남겨두고, 유학을 결심한다. 나를 위해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내맘대로 되지 않는법,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3개월의 열애(?)끝에 우린 결혼했다. 빚갚느라 모아놓은 돈이 없는 나는 국민연금을 일시불로 찾아서 혼수를 준비했고, 친척은 역사적인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전자제품을 하나씩 장만해줬다. 친척들은 결혼이 역사적이라고 생각했던 듯 싶다. 50만원에서 100만원가까이 거액을 선뜻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간 나의 성장사를 옆에서 지켜본 친척들은 결혼까지 꼴인하여 남들처럼 살아가는게 대견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고 했다. 결혼식장에서 고등학교 내내 신세졌던 막내이모부는 눈물까지 훔쳤을 정도니까.

물론 엄마는 그 돈을 관리하고 싶어하셨다. 친척은 엄마에게 돈으로 줬고 난 그 금액이 전부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제일 작고 저렴한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TV를 마련했다. 내가 고르고 싶었지만, 엄마노릇을 하고 싶었던 엄마는 당신이 하다못해 발판깔개까지 전혀 나의 취향과 상관없이 구비했다.


“지금 할일이 많은데 어떻게 거길 가니?”

출산하자마자 아이보러 병원에 오시라고 전화했더니 하시는 엄마의 말씀.

그 할일이란게 실은 집안청소였다. 딸이 출산해서 버선발로 달려오리라는 기대는 물론 무너졌다. 넷째이모가 먼저 달려왔다. 가장 비싼 유모차를 준비해서 말이다.

산후조리는 어떻고. 결혼하면서 용인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해온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개인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난 그곳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했다. 빨래며 먹을거리며 챙기느게 얼마나 고단했을지 아는터. 시어머니는 좋다는 산후조리용 음식을 사다 나르기 바빴다. 그런 와중에 엄마는 문득문득 고단하다며 짜증내신다. 난, 몸을 추스르기는 커녕, 기저기빨래를 해야했다.


“너한테 신세지지 않을테니 걱정마”

엄마는 위암수술을 했다. 아이양육이며 일이며 서울서 오가기가 힘들어 저녁때만 도우미를 쓰자고 제안했더니 엄마는 낮에도 필요하다고 한다. 수술후에 혼자 운동이 가능했던 때에 난 병원비를 줄이기 위해 제안했던 건데 몹시 속상했다보다. 간병인 인건비는 병원비보다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벌써 수술만 해도 세 번째다.

두 번은 친척들이 대주었지만, 간병비 정도는 내가 지불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입퇴원이 서너번 이어지면서 나는 한번에 100만원이나 되는 입원비를 지출해야 했다. 속상하고 분통해서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아픈사람에게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나도 인간 아닌가. 엄마는 그럴때마다 “너에게 신세지지 않을테니 걱정말라”며 영수증을 잘 보관해두란다.

그돈? 물론 없던일이 되었다. 누가 그돈을 준단 말인가. 엄마 통장에는 잔고가 없다.

그동안 오가면서 사람들이 준 용돈과, 사당 관리하면서 받은 월급은 어디로 가고 정말이지 산뜻하게 비어있는 통장을 보니 어이가 없다.


엄마는 아프면서 친척들에게 짐이되어가고 있었다.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도 하나둘 줄어들고, 더 이상 병원비가 얼마나왔냐고 묻는 사람도 없다. 그러면서 슬슬 딸의 책임론이 친척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어찌됐든 결혼해서 살고 있으니 딸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냐는 말. 난, 분노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내 자존심에 그런 욕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다.

엄마는 병상에서 딸에게 신경쓰는 반이라도 자신에게 신경쓰라며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난, 분노를 잠재우려 맵지않은 손끝으로 천생리대 바느질을 하며 병원생활을 이어갔다.















The future: 효도는 역행이다


내리사랑은 순행이다. 누구나 부모가 아프면 걱정되고 자식이 아프면 가슴이 아리다. 우주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효도는 역행이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 효도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자식들은 효행 권하는 사회에 주눅들어 있다.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으로 돈버신 부모님께 기생해야 하는 자식들에게 효도는 본능에 가깝지 않던가.

부모님께 빚진자들은 그렇다 치고, 나를 이승에 살포시 내려놓고 달아나신 엄마께 내 미래를 팔아 효행의 길로 가는 티켓을 사야 한단 말인가. '삶‘이란 걸 안겨주었다는 ’축복‘으로 말이다. 억울하냐고? 솔직히 억울하다. 30대 중반이 넘으로 포기도 된다. 그럴수록 분노가 사그러드는 것도 사실이다. 엄마의 삶을 이해해서가 아니다. 이놈의 세상이라는게 혼자 잘났다고 승승장구하는게 아님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아픈엄마도 없어야 하고 아픈자식도 없어야 하고 살다가 애만 남겨놓고 죽어버리는 남편도 있으면 안된다. 장애도 없어야 하고 패는 남편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적 삶을 살 수 있다.


난, 자식을 기르면 기를수록 점점 엄마에 대한 분노가 쌓여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런 자식의 보따리를 어떻게 쌀 수 있었는지, 그간, 양육하지 않고서도 덥썩 딸의 품에 안겨 의지할 수 있었는지. 남들처럼 사는 보통적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내게 효도하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를 괴롭히는 분노의 포도송이, ‘효행바라는 주변인의 시선’이 뺑소니처럼 눈깜짝할사이에 달아나버리면 좋겠다. 아니, 그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엄마, 나, 딸 셋은 한달에 한번 목욕탕을 간다. 창조의 샘터, 목욕탕은 본래 혼자 가야 제격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인가. 나는 혼자 목욕탕을 다녔다. 물에 흔들리는 육신을 묻고 그간의 기억을 갈빗살 펴듯 죽죽 펴서 칼집을 내는 동안 생각도 정리되고 문득 좋은 아이디어도 샘솟는다. 굵직한 사업계획도 내 영혼의 샘터에서 건졌다. 그만큰 나에게 있어 목욕탕은 왕왕대는 소음마저 그리울 정도로 내 영혼의 안식처이자 정기적으로 성찰하는 예배당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엄마가 우리집에 오시고 나서 영혼의 샘터가 아니라 효행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남 등때밀어주는 재주가 없는 나는 피부청결사에게 엄마를 맡기고 딸은 넓은 냉탕에 맡기고 그들이 넘어지지는 않았는지, 잘 쉬고 있는지 살펴보고 대충 시간을 때우다 온다.

좀 짜증스럽지만 유일한 효행의 시간이기에 숙제하듯 한달한달 목욕탕을 다녀온다.

목욕가방을 싸며 딸은 질문한다. “엄마, 할머니는 안가셔?”

나는 대답한다 “당연히 같이 가시지”

딸은 펄쩍 뛰며 좋아한다. 그리고 엄마는 딸의 행동에 반응한다. “너는 이 할미가 가는게 그렇게 좋으냐?”.

“네, 할머니”.

“왜?”.

“할머니랑 가면 재밌으니까요”

“할머니랑 가는게 그리도 좋으냐?”

“그럼요. 할머니랑 가면 아주 재밌어요”

딸은 할머니를 좋아한다. 내가 가진 분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내 딸은 2학년이다.

이해할 수 없지. 개그계에 입문하고자 하는 손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탄하고 배꼽잡고 웃어주는 사람은 외할머니밖에 없다. 외할머니를 소중한 친구로 생각한는 유일한 손녀. 그런 손녀의 사랑 때문에 인생이 즐거운 우리엄마.

고기좋아하는 것. 현실에 충실한 것. 마음 약한 것. 자기자신을 좋아하면 다 퍼주는 것. 크게 웃는것. 책임이 깊어지면 짜증내는 것.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것. 잔소리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 엄마와 나의 딸 두명의 공통점은 나열하기 힘들정도로 많다.

그래서 둘은 잘 통한다. 내가 보기엔 맛깔스럽지도 않고 짜기만 한 음식을 우리딸은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고.

그러면 엄마는 신이나서 통장의 돈을 싹싹 털어서 장을 본다. 덕분에 손녀딸은 고도비만의 길을 걷고 있다. 엄마에게 있어 우리딸은 정신과 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손녀딸을 돌보며 자신이 가족원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인식하고 있는 엄마.

그러나 날이 풀리면 다시 용인으로 돌아간단다. 건강해지면 언제나 그렇듯 다른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모든 짐을 뺀 용인의 작은 집에서 다시 홀로 생활한다고 하는 엄마.

난 또 매일매일 불안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픈 엄마를 가까이 두고 살아야 하는 친척들은 위급상황에서 나를 원망하고, 나는 방망이질 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새벽이든, 밤이든, 액셀을 밟아야한다. 장이 꼬여서, 배가 아파서, 당이 떨어져서, 감기에 걸려서...

같이 있지 못하면 사전에 조치를 취할 수 없어서 더욱 불안한데도 엄마는 기어코 용인집으로 간다고 한다. 몸이 좋아지고 날이 풀리면 말이다.

난,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한다. 언제나 엄마 원대로 해왔기 때문이다. 엄마의 언니동생들이 엄마의 딸인 나를 욕하든 말든, 사위를 무능력하다고 지탄하든 말든, 엄마는 가고싶은 곳에 가야하는 것이다. 외할머니를 떠나보내려면 손녀는 슬플 것이고, 나는 불안할 것이고, 사위는 좀 자유로워지겠지.


미래, 암담하다. 분노가 사라졌나 싶으면 어느새 순간순간 욱하는 엄마마냥 시도때도 없이 숨구녕으로 주먹질한다. 그래서 나의 그 분노로 인해 미래는 그리 밝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정말 개인적인 나만의 ‘악의 축’을 제거하는데 평생을 바치고 싶을 따름이다.  


첫째, 순한 엄마의 과거사의 아픔을 제거해야 한다.

엄마는 착하다. 순하다. 다른사람에게 큰소리한번 내보지 못한 사람이다. 자신의 생사를 거머쥔 사람에게는 한없이 순한 엄마는 유독 당신의 엄마와, 내게 욱하며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화를 낸다. 공사를 위해 방문한 철물점 아저씨가 누수탐지를 하느라 침대를 옮겨놓았다. 집안은 이사간 집처럼 지저분해지고, 엄마는 낯선 남자의 방문에 맘이 놓이지 않았나보다. 그에게 물이 새는지 어떤지 물어볼 수도 있고, 차한잔이라도 대접하면서 시간을 때울 수 있으련만. 일하고 있는 네게 전화하여 욱한다. “너는 지금 집이 어느지경인지도 모르고 밖에서 뭐하고 있냐? 얼렁와 이것아”

낯선사람과의 대면이 스트레스인 것이다. 엄마가 우리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동안 인근에 사시는 시어머니는 하루가 멀다하고 집에 방문하셨다. 아픈 사돈을 위해 엄마가 드시고 싶다는 문어며, 김치며, 각종 나물, 식혜 등등 정성으로 음식을 준비해서 가져오셨다.

시어머니가 오고 가신 날이면 엄마는 내게 말씀하신다. “도대체 왜 며느리네 집을 뻔질나게 드나드는지 모르겠구나, 아무래도 나한테 뭔가를 캐내려고 하는거 아니겠니?”.

저혈당 쇼크로 위급상황을 경험했던 엄마가 걱정되어 사위가 매일 아침 문을 열어본다. 그런 사위의 행동을 보고 내게 말씀하신다. “나는 추운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아침이면 사위가 꼭 보일러를 줄이고 간다”고 말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그녀, 살아오면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초등학교때 도무지 학교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서커스단 쫓아다니느라 3학년때 자퇴, 이후로 집안일중 빨래를 유일하게 맡아서 가사노동에 시달리다 농촌봉사활동 온 대학생들의 구애의 편지를 받음. 열혈남성들이 엄앵란처럼 뽀얗고 이쁜 그녀를 그만 놔둘리 없으나 연애할 용기도 없어서 부지깽이로 두들겨 맡고 연애활동 접음. 그러다 평범한 남자와 결혼함. 지긋지긋한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뛰쳐나옴. 당시 시어머니는 아들과 며느리가 잠자리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고 함. 한밤중에도 며느리를 불러서 요강 치워라, 주물러라, 청소해라 등등 달달 볶았다고 함. 당시, 결혼실패는 집안의 엄청난 수치로 그녀는 곧장 친구와 가출을 결심함. 서울 한복판에서 그녀는 무슨 일을 했을까? 이쁜 그녀는 주로 찻집에서 일한 것으로 추정함. 짜장면집을 찾았다가 나의 아빠를 만났고 그녀는 결혼했다. 결혼식도 했다고 하던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는 미혼모가 된 것. 그러니까 나는 둘째부인의 딸이 된 셈이다.

이번 결혼 또한 시댁가족이 전혀 인정하지 않아서 아빠와 헤어지고 나서 자식의 양육비를 한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사람에게 싫을 소리를 한마디도 못하는지라 그러면 그런가부다 하고 살았던 그녀. 살면서 누구하나 그녀를 칭찬하는 가족은 없었다. 왜 그렇게 한심하게 인생을 자기것이 아닌냥 살아가는지에 대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는 잔소리듣는 엄마를 보며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어려서부터 잘하는게 없어서 말라가던 자존심이 아예 자취를 감춰버리는 사건. 그녀의 공식적 재혼이다. 세탁소며, 쭈꾸미 식당, 청량리 건강원 등 각종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뒷짐지고 있는 남편 부양하랴, 아이 둘을 기르냐 젊은 시절을 내어놓았던 그 시절. 그녀는 행동거지 하나하나, 하다못해 반찬거리 종류와 맛에 대해서 지적받아야 했다. 손님과 5분이상 잡담을 해도 그날 매질을 감수해야 했다. 의부증으로 아내를 6명이나 바꿔야 했던 남자를 만나서 10여년을 고생한 그녀에게 남아있는건 성치못한 몸둥아리와 나, 딸 한명뿐이었다.

결국 엄마의 고갈된 자존감을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의 미래를 위해서 엄마의 아픔을 도려내야 한다.

엄마같이 살지 않으려고 애써온 나머지 이젠 성격과 취향, 하다못해 입맛까지 나와 다른 엄마를 그들처럼 야단만 쳐오던 나의 행동을 수정할 때가 왔다.

엄마의 ‘욱’은 나의 ‘야단’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미래는 엄마의 아픔이 전이되지 못하도록 최대할 깔끔히 수술해야 한다.


둘째, 엄친아들을 없애야 한다. 아니 부모님들의 허영을 없애야 한다.

요즘 ‘엄친아들’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엄마 친구의 아들 말이다. 하나같이 명문대 졸업에 일류기업에 척척 취직도 잘되는 그 아들들은 자식들을 마냥 꽈리고추처럼 쪼그라들게 만든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6인실 병실에 가면 옆침대 노인의 자식은 하나같이 성공해서 부모병문안 올 시간이 없거나, 며느리는 하나같이 다들 교사나 공무원이란 말인가.

어쩌다 간병을 하는 자식이 있는경우, 딸도 아닌 아들이 그렇게 지극정성 부모를 돌보다니, 엄마는 6인실 병실에서 점점 상대적 빈곤감(?)에 짜증이 옥탑방처럼 치솟는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만 하면 나는 자꾸 쪼그라든다.

지극정성으로 간병해도 모자랄판에 책만 읽는다든지, 남들에게 내놓을 교사도 아니고 공무원도 아닌 딸이어서 그저 한마디 못하고 있는 본인의 처지가 그저 비관스러운가보다. 나는 지속적으로 입원하는 엄마와 병원안에서 괴로워하고, 이후 앙금이 남아 계속해서 갈등한다.이세상의 종합병원들이여, 6인실은 칸막이를 쳐주기 바란다. 아니면 잘난 자식을 둔 부모님께서는 2인실에 들어가시든가.


<병원안의 허영>

중환자가 적은 일반병동 6인실은 시끌벅적하다.

주로 아들며느리 자랑 일색이다.

성공(여기서 성공이란 직장의 개념이 강함)한 자식자랑으로 입이마를 지경.

도대체 성공한 그 자식들은 얼굴한번 본적 없다.

엄마의 입원치료로 인해 난 3년간 총 5~6개월정도 병원서 보내왔다.

물론 오늘도 병원이다. 6인실.

며느리가 너무 곱고 악의가 없다거나

저렇게 사근사근한 며느리를 뒀으니 좋겠다라거나

우리아들은 000대학을 나와 00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등.

심지어 키가 177밖에 안되서 속상하다는 아줌마도 있다.(168의 울남편은 사람도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성공한 자식들을 두고도 왜 이렇게 시장바닥같은 6인실에 누워있는가 묻고 싶다.

심지어 그 아드님은 병원에 언제 오시는지 원.

병실생활을 시작하면

그 허영의 도가니속에서 벼텨야 한다.

조용히 입다물고 있는 엄마의 매너가 고마울 따름이다.(물론 자랑할 거리가 없겠지)

결국, 병원에 입원해서는 특히 6인실에 부모님을 모셨다면

우선, 성공한 자식이 있어야 한다.

며느리는 예쁘게 생겨야 화제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점, 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는 사실. 왜그럴까나?

허영은 자존심의 결핍이다.

무언가 본인 스스로 자존감이 낮아서 오는 신경증 같은 것 아닐까?

속내를 모르는 익명성을 담보로 마구 자랑하는 저 어르신들. 또 며칠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가령, 영화관에서 시어머니와 같은 모습니다.

가족과 아주버님의 좌석이 떨어졌다. 그 사이 다른 관객이 앉자, 자리를 옮겨달라면서 하는말씀, "저어, 황교수~ 자리를 이쪽으로 옮기지 그래?"

영화관에서 아드님 이름을 부르면 될 것이지,"황교수우~"는 뭐란 말인가?

부모님들의 허영은 자식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시는지.

상대적 초라함을 야기하여 가진것 없는 자식을 절망에 빠지게 한다.


셋째, 가족복지 권하는 사회를 바꿔야한다.

엄마의 병세가 깊어지고, 시력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나는 평소 친분이 있는 시각장애인노인 그룹홈에 엄마를 입소시키고자 했다.

도무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육받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덤덤하게 입소를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성껏 길러주신 엄마였다면 한참 갈등했을 일이다.

그러나 아직 우린 같이 살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부모님 부양의 의무는 당연히 자식에게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보더라도 부양의무자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다.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 무슨일이 벌어졌는지는 관심도 없다. 나는 부양의무자로서 내가 죽어자빠지기 전에는 무조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다.

그 책임이 무서워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시설만을 알아본 것 같다. 내가 무서웠던 것은 엄마와 함께 산다는 사실 그자체가 아니라 효행하지 못하는 내 태도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노인은 재산이 있어도, 없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인것 같다. 공기좋은 실버타운에서 다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어르신이 증가한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식이 부양하면서도 온전히 가족안에서 복지를 해결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실은 잘 모르겠다. 부모의 헌신적인 자식사랑을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부양의무 책임을 묻지 않는 각서를 받을 수도 없고 말이다.


엄마는 5월이면 우리집을 떠난다. 다시, 냉장고와 살림살이를 준비해야 한다. 그맘때쯤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엄마는 다시 아프고 병원살이를 해야하고 아이는 자라고 나는 더욱 바빠질 예정이다. 계획한 대로 살아지는 인생이 아닌 이상,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그 여유는 분노와 악의 축을 제거한 댓가로 얻어지리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딸에 대한 질낮은 세계관, ‘질투’를 제거하고, 과거의 원죄를 이용하여 엄마의 죄책감을 증폭시키는 행위를 제거하고, 현재의 나를 만든 삶의 공간에 대한 불만을 제로로 만들기 위한 연습과 훈련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 훈련의 첫걸음은 이프의 ‘안토니아스 라인을 찾아서’가 될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기록은 내 치유의 한 방편이다.

잘되면 과거를 파는 것이요, 안되면 치유의 도구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