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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식코-자본주의심장에화염병을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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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일변도를 반성했었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며
나는 공적서비스가 미치지못하는 곳을 공동체가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고 지랄이고 우리가 서로서로 기대어 행복하면 그만이라고도 생각했다.
자선도 늘고, 기업의 사회공헌도 증가했다.
그런데 폭탄처럼 사회적 이슈는 펑펑 터지고
우리는 대응할 수 없었다.
분노를 조직하려고 하면 자기일처럼 여기지 않거나
혹은 실패로 점철된 투쟁의 성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정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국사람처럼 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사람들은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공적서비스 틈새를 애써 이웃끼리 만들어 내지 않아도 행복한 개인주의를 만끽 하고 살고 있었다.
빈부를 막론하고 누구나 건강권을 지킬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차비도 준다.
비싼돈을 들여야 맛볼 수 있는 개인병실에서 행복하게 출산할 수 있고
육아시설에서는 안전하게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이도 파견한다.
육아휴직은 우리가 보기에 지루할 정도로 길다.
휴가 또한 길고길다.
공원에는 한가로이 배깔고 누워 책을 보는 이들로 붐비고
남녀는 부담없이 사랑을 나눈다.

프랑스와 미국의 차이는?
정부가 국민을 무서워하느냐, 국민이 정부를 무서워하느냐에 달렸다는 것.
행복할 권리를 위해 기꺼이 분노가 조직되고
반드시 심판하는 과정에 사람들이 함께한다.
정부는 국민의 분노가 두려워 시스템을 정비한다.

미국은?
1%의 기득권의 행복할 권리를 위해 99%는 분노를 다스린다.
아픈사람을 갖다버리는 병원
진료를 거부하는 %에 따라 보너스가 지급되는 무서운 사회.
없으면 죽으라는 시스템의 폭력앞에서
쪼그라들어 있는 미국 국민.

혼란스럽다.
알콩달콩 살아가는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자체가
혹시, 분노를 잊어먹게 만들거나
혹은 현 절망적 시스템을 인정하고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린 그래서 개인이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가 해결할 몫마저 공동체가 해결하려면
결국, 돈과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만 가능한 것 아닌가.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까지
행복할 수 있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시간없다고 종종거리거나
정치하는 놈들 다 드럽다고 술푸거나
육아를 놓고 가부장과 싸우며 보따리는 싸는 것.
등등....
우리는 어쩌면 기득권을 위한 시스템이 원하는 대로
우리끼리 분열하고 싸우면서 불행하게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따뜻한 봄날,
공원에서 한가로이 책을 보고 싶다면
다시, 분노를 조직하고
자본주의 심장에 화염병을 던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