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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두번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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떻게 만나든 사랑은 사랑이다.

죽일놈의 한국기독교는 미국까지 날라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아이생산으로 증거하고싶어하시니, 아브라함이 낳은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시매 소피의 가정에도 아이가 탄생하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마치, 그 엄숙하고 우스꽝 스러운 기복적 기도를 반박이라도 하듯 혼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한 표정을 짓는다. 일단, 기도장면에서 공감.

한번 섹스에 3천달러, 아니 섹스라고 하기보다 정자주입 1회에 돈을 받는 알바생 지하와의 소피의 거래. 영화 '색계'에서처럼 흥분과 윤활유 없는 퍽퍽하고 건조한 섹스로 시작한다. 보풀이는 담요를 바꾸고, 꽃을 사고, 복숭아를 사는 지하는 어느덧 소피를 배려하고 있다. 사랑이 시작된 것. 그러면서 정자주입행위는 섹스가 되고 섹스는 관계가 된다.

배려는 섹스의 윤활유다?

두번째든, 세번째는 사랑이 아닌것은 없다. 다만 대상과 색깔이 다를 뿐이다.
이전 사랑과 지금의 사랑을 비교하는 것은 멍청한 짓.
어떻게 만나든, 몇번째 만나든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면죄부를....

다만, 그녀가 가장 주체적으로 해낸 일이란게 임신인데, 그럼, 여자의 행복은 아이뿐이란 말이가?아니면 아이가 희망의 상징인가? 마직막 임신한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가?
감독의 의도를 캐는건 너무 작가주의적인가?

이젠, 머리가 점점 단순해져서인지, 다소 상징적이거나 심오한 영화를 보면 의문이 남는다.
아! 자막없는 영화를 보는건 눈치만 느는 일이다.